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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오(東吳)몰락의 서막: 이궁지쟁(二宮之爭)과 손로반(孫魯班)

赤松子 - 내 블로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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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오(東吳)몰락의 서막: 이궁지쟁(二宮之爭)과 손로반(孫魯班)


글: 소범독사(小凡讀史)
이궁지쟁은 남로당쟁(南魯黨爭)이라고도 부르는데, 삼국시기 동오의 태자(太子) 손화(孫和, 손권의 셋째아들)과 노왕(魯王) 손패(孫覇, 손권의 넷째아들)간의 후계쟁탈로 인해 일어난 당쟁을 가리킨다. 동오에서는 동궁을 "남궁(南宮)"이라고 불렀고, 손패는 노왕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동오조정은 이 정치사건을 "남로당쟁"이라고 부른다.
남로당쟁은 8년간이나 지속되며, 동오의 많은 원로, 귀족, 공경대신들이 혹은 적극적으로 혹은 피동적으로 이 후계다툼에 말려든다: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세불양립이 된다, 그리하여 "중외관료장군대신거국중분(中外官僚將軍代身擧國中分)"의 위급한 국면이 형성된다. 육손(陸遜)은 손권에게 압박을 받아 죽고, 많은 충신들이 박해당하거나, 유배가서, 동오정권의 실력이 크게 약화된다. 최종적으로 소제(少帝) 손량(孫亮)이 즉위하고, 제갈각(諸葛恪), 손준(孫峻), 손침(孫綝)이 차례로 권력을 농단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적오4년(241년) 오월, 손권의 장남 손등(孫登)이 사망한다. 손등은 인자하고 효성이 있고, 아랫사람들을 예로 대했다. 그는 손권이 가장 좋아한 아들이다. 221년, 손권은 오왕(吳王)을 칭하고, 손등은 일찌감치 왕태자(王太子)로 세워진다. 손권이 칭제한 후, 손권은 다시 태자(太子)로 세워진다. 손등은 손권의 장남이며, 가장 우수한 후계자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손등은 겨우 33살의 나이로 사망하니, 이는 손권에 침중한 타격이 된다.
손등이 죽은 후, 태자의 자리가 비어있게 된다. 당시 최연장자는 손권의 셋째아들 손화(孫和)였다. 차남 손려(孫慮)는 232년에 이미 사망했다. 손화는 어렸을 때 자질이 총명하여 모친 왕부인(王夫人)이 손권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손권의 사랑을 받는다. 손등도 죽기 전에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손화를 태자로 세울 것을 권한 바 있다. 242년, 손권은 손화를 태자로 세운다.
손권에게는 후궁비빈이 아주 많았다. 다만 그가 가장 총애한 여인은 보련사(步練師)였다. 보련사의 바로 다음가는 총애를 받은 여인이 바로 손화의 모친 왕부인이었다. 보련사는 238년 사망했고, 지금은 손화가 태자로 세워졌다. 모친 왕부인은 계속 손권의 총애를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 손화의 태자지위는 아주 공고해 보였다. 그러나, 기실 누군가 암중으로 손화를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련사는 손권과의 사이에 두 딸을 낳는다. 한명은 손로반(孫魯班)인데, 전종(全琮)에게 시집가서, 전공주(全公主)라 불렸다. 다른 한명은 손로육(孫魯育)인데, 주거(朱據)에게 시집가서, 주공주(朱公主)라 불렸다. 손권이 보련사를 총애했기 때문에, 장녀 손노반도 아주 좋아했다. 다만, 여자가 많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손로반과 손화의 모친 왕부인은 계속 사이가 좋지 못했다. 지금 손화가 태자에 세워지니, 왕부인은 득의양양했고, 손로반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손권이 처음에 태자와 노왕을 봉할 때, 손화와 손패는 마찬가지로 총애를 받고 있었고 여전히 같이 궁전에 거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아직 정식으로 품급을 구분하지 않았다. 신하들 중에서 태상(太常) 고담(顧譚), 태자태부(太子太傅) 오찬(吾粲)등은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태자와 왕은 적서의 구분이 있어야 하고, 예제도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노왕을 지방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자와 노왕은 이때부터 서로 궁을 나누어 거주하게 되고, 이로 인해 갈등의 발단이 조성되었다.
노왕은 자신의 지위가 하락한 것이 태자와 그의 일당들로부터 해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자신의 빈객들과 같이 있을 때, 함께 태자와 태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폄훼했다.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간의 갈등을 독랄한 손로반이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는 암중으로 손화를 모함할 시기만 기다리며, 계속 사람을 보내 손화를 감시했다.
245년, 손권이 중병에 걸려 병상에 눕는다. 손화로 하여금 종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 복을 빌고 재난을 물리치게 한다. 손화의 태자비 장씨(張氏)의 숙부 장휴(張休)의 집이 종묘 가까이 있었다. 그리하여 손화를 집으로 초대한다. 손로반이 보낸 인물이 감시하다가 이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손로반은 궁으로 뛰어가 손권에게 손화가 종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태자비의 집으로 가서 대사를 모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년에 손권은 보련사, 손등이 연이어 죽으면서 극히 의심이 많아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감정을 통제할 수 있었다. 손로반은 손권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부인은 부친의 병이 위중한 것을 보고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자, 손권은 더 이상 내심의 분노를 참지 못한다. 사람을 보내 왕부인을 불러 질책을 하고 욕을 한다. 그 결과, 왕부인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하게 죽어버린다.
그후, 태자 손화는 점차 총애를 잃는다. 노왕당(魯王黨)은 더욱 미친 듯이 날뛴다. 그들은 계속하여 각종 기회를 잡아 태자당의 대신들을 공격한다. 손로반이 손권의 곁에서 계속 참언을 고했기 때문에, 많은 태자당의 대신들이 모함을 당해 해를 입는다. 당시 동오의 승상(丞相)이던 육손마저도 당쟁에 휘말려 결국 손권에 의해 압박을 받아 죽고만다.
남로당쟁이 갈수록 격렬해 졌고, 손권도 마침내 깨닫게 된다. 양당의 내부다툼의 결과로 조정이 이미 갈갈이 찢겼다. 만일 다시 두 사람중 한명을 즉위시키게 되면 조정은 더욱 불안해질 것이고, 내부투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마치 원소가 죽은 후에, 원상과 원담이 완전히 양파로 나뉘어 갈라졌던 것처럼. 그리하여, 다시 다른 아들들 중에서 태자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손로반은 손권의 이런 마음을 재빨리 포착한다.
손권의 비(妃) 반숙(潘淑)과 그가 낳은 아들 손량(孫亮)은 손권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손로반은 손권의 마음을 읽고 스스로 나서서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다. 전종의 족손녀(族孫女) 즉 전상(全尙)의 딸인 전씨(全氏)는 용모가 아름다울 뿐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잘 읽었다. 그리하여 전공주가 아주 좋아했다. 그리하여 손로반이 궁중으로 손권을 보러갈 때면 항상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전공주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전상의 딸이 괜찮다고 말하면서, 부황에게 손량의 비로 들이게 하도록 권한다.
250년 칠월, 손권은 정식으로 손화를 태자에서 폐위시키고, 노왕 손패는 사사한다. 그리고 태자를 모함하는데 가담한 노왕의 일당 전기(全寄), 오안(吳安), 손기(孫奇)를 주살한다. 십일월, 정식으로 손량을 태자에 앉힌다. 252년 손권이 붕어하고, 손량이 즉위한다. 소제 손량은 즉위후 다음해(253년) 전비(全妃)를 황후로 봉한다. 손로반은 외척의 신분에 옹립한 공까지 있어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게 된다.
손량은 즉위시에 나이가 겨우 10살이었다. 그리하여 제갈각, 손준, 손침등이 전후로 권력을 농단하는 국면이 펼쳐진다. 그리고 손로반은 계속 거기에서 중요한 작용을 발휘했다. 태평3년(258년) 손로반은 태상(太常) 전상(全尙), 장군 유승(劉丞)등과 권신 손침을 주살할 것을 모의하나, 사전에 누설되어 예장(豫章)으로 유배를 간다. 그후 행적은 알지 못한다.
손로반은 손권의 장녀로서, 아주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권력욕은 너무 강했고,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녀는 남로당쟁 막후의 최대의 검은 손이었다. 소제 손량이 즉위한 후, 손로반은 다시 손준과 결탁하여 함께 조정을 좌지우지한다. 그녀는 동오에 십여년간 화를 끼친다. 정말 '전설'적인 여인이라 할 수 있다.

위촉오 삼국의 화폐정책: 건위오수(犍爲五銖)와 대천오백(大泉五百)

글: 천료역사재(淺聊歷史齎)
서론
중국고대의 화폐주조는 매우 골치아픈 일이었다. 왜냐하면 전폐(錢幣)의 분량도 맞추어야 하고, 색깔도 아주 중요했다. 한무제(漢武帝) 이전에는 전폐의 상황이 거의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동전주조기술을 장악한 후에는 대량으로 열악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한다. 이들 열악한 동전을 시중에 유통시킨 후, 양호한 동전은 자신이 가져온다. 그리고 양호한 동전을 이용하여 다시 열악한 동전을 주조한다.
예를 들어, 여기서 말하는 열악한 동전에 4전의 구리가 필요하다면, 양호한 동전에는 8전의 구리가 필요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후, 유비는 양호한 동전을 회수하여, 양호한 동전 1개로 열악한 동전 2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순환되면 백성들이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은 여전히 같지만, 오왕 유비만 승리자가 되는 것이고, 그의 주머니에는 동전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동전의 구매력은 기실 절반으로 하락하게 된다. 부가 감소했을 뿐아니라, 그 감소한 부는 유비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한무제는 화폐를 개량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는 유명한 오수전(五銖錢)을 발명한다. 이 동전의 중량은 오수(五銖)이다. 이 동전에는 가짜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화폐환경을 양호하게 개선했고, 오수전은 동한말기까지 계속하여 사용된다.
동한말기, 오수전의 가치하락이 심각했고, 백성들은 물건을 구매하는데 불편했다.
동한말기에 이르러,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동전은 이미 가치가 많이 하락했다. 특히 황건적의 난 이후, 전란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논밭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적어지고,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식량생산이 크게 감소한다.
동한은 농업대국인데, 경작하는 양식이 심각하게 줄어들자, 많은 사람들이 굶는 상황이 발생한다. 먹을 것이 없으면 군대에 들어가 병사가 된다. 그리하여 병사는 많아지고 농사짓는 사람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다음 해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병사가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착실하게 농사짓는 사람은 몇몇 남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동한 말기에는 무엇이 가장 비싸졌을까? 바로 양식이 가장 비싼 물건이 되어버린다.
오수전은 비록 사용하기에 아주 편리하지만, 이것으로 양식생산량의 심각한 감소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동전의 가치는 부지불식간에 절하된다. 다른 물건이라면 그래도 괜찮다. 옷같은 경우에는 화려한 의복이 비싸면, 싼 것으로 사서 입으면 된다. 도시의 집값이 비싸면, 교외로 나가서 사서 살면 된다. 그러나 식량은 그렇지가 않다. 매일 모든 사람이 먹어야 한다. 식량이 부족해지면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게 된다. 이렇게 되면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양식을 구매하려면 한 가마니의 오수전을 등에 지고 가서 사와야 한다. 식사를 하려고 해도 목에 오수전을 목걸이처럼 가득 달고 가서 먹어야 한다. 그래서 백성들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화폐 자체의 품질이 하락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수전은 여전히 무게 그대로 오수전이고, 재질도 원래 그대로이다. 다만 이때의 오수전으로는 물건을 많이 살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동인(銅人)과 종거(鐘虡, 종을 거는 틀)를 모조리 부수고, 오수전을 없애고, 다시 소전(小錢)을 주조했는데, 크기가 오푼이고, 글도 없으며, 두텁고 윤곽도 없으며, 매끈하게 갈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돈은 가치가 없고, 물건은 비싸져서 곡물 1곡(斛)에 수십만전이 되어, 그후부터 화폐로 물건을 살 수 없게 된다." <삼국지.동탁전>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상품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싸진 것이다. 나중에 시장에서 동전은 유통되지 않게 된다.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물물교환을 하는 원시시대로 회귀하게 된다.


2. 유비의 건위오수(犍爲五銖), 문제해결과 동시에 착취도구가 되다.
이때 우리의 비교적 인의로운 군주라는 유비가 등장한다. 그가 등장하는 방식은 비교적 특별하다. 등장하자마자 그는 새로운 동전을 내놓는다. 이름하여 "건위오수"이다.
"건위오수"란 무엇인가? 이건 재미있다. 왜냐하면 이 동전은 "건위군"이라는 곳에서 주조한 것이기 때문에 건위오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전의 액면가격은 아주 크다. 1개의 건위오수는 100개의 오수전에 해당하는 것이다. 유비집단은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여러분은 동전으로 거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화폐의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이건 겉으로 보기에는 백성들의 편의를 위한 조치이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방법이다.
이전에는 식당에 갈 때 가마니에 오수전을 넣어가야 했지만, 지금은 건위오수 몇개만 가지고 가면 된다. 다만 건위오수의 출현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 그것은 바로 시장에서 오수전이 갈수록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회총자산의 양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그 줄어든 부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원래 모조리 유비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이었다. 유비가 발명한 이 건위오수는 액면가치가 오수전의 100배에 달하지만, 중량은 여전히 예전 오수전과 같은 중량이다. 그는 단지 앞면에 액면가격만 100배로 적었을 뿐이다. 이건 미친 짓이다. 유비는 동전주조기술을 장악한 후, 무수한 오수전을 회수하여 다시 액면가격이 100배인 건위오수로 주조하여, 시중에 내놓았던 것이다.
새로 1개의 건위오수를 만들면 100개의 오수전으로 바꿀 수 있다. 다시 바꿔온 오수전을 건위오수로 주조하게 된다. 이렇게 1대 100으로 유비는 백성들의 돈을 긁어간 것이다.
"처음에 유장을 공격할 때, 유비는 사중(士衆)들과 약속을 한다. 만일 일이 성사되면 부고(府庫)의 물건은 내가 간섭하지 않겠다. 마침내 성도를 점령하고, 사중들이 무기를 버리고 창고로 달려가서 재화를 취했다. 그렇게 되니 군사비용이 부족해져서, 유비가 고민하게 된다. 유파가 말하기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백전을 주조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여 물가를 잡고, 관용화폐로 삼으면 됩니다' 유비가 그의 말에 따랐고, 몇달만에 부고가 충실해진다." <삼국지.유파전.배송지주>
당연히 유비집단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돈은 조조와 싸우는데 쓸 것이다. 어쨌든 유비집단의 백성은 모두 한나라의 회복을 원했고, 자신이 아무리 심하게 착취당하더라고 관계없었다. 관건은 대한왕조를 회복시키는 것이기 떄문에.


3. 손권의 대천오백은 더욱 심하다. 좋은 것은 배우지 않고 나쁜 것만 배웠다.​
손권도 야심이 큰 인물이다. 그는 촉한의 유비가 동전을 주조하여 민간자본을 끌어모으는 것을 보고 자신도 따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도 국내의 자본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고 싶었다. 백성들이야 먹을 것만 있으면 된다. 지나치게 부유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배부르면 음욕이 생각나는 법이니까. 겨우 먹고살만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상을 가지고 손권은 대천오백이라는 동전을 만든다. 이 동전은 너무 심했다. 같은 원리로 유비는 겨우 100배짜리를 만들었는데, 손권은 500배짜리를 만든 것이다.
손권은 돈이 부족했던 것같다. 그는 어떻게 하면 최단기간내에 돈을 모조리 긁어모을지를 생각한 것같다. 그래서 나중에 1대 500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계속 신상품을 내놓는다: 대천당천(大泉當千), 대천이천(大泉二泉), 심지어 대천오천(大泉五千)까지.
"손권 가화5년, 대전(大錢)을 주조하여 1당 오백으로 했다. 적오원년, 다시 1당 천전을 주조한다. 그리하여 여몽이 형주를 차지했을 때, 손권은 여몽에게 전1억을 하사한다. 돈의 금액은 크지만 쓸모는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우려하게 된다. 손권은 백성들이 불편해 한다는 것을 듣고 유통을 중단시키고, 기물을 주조했으며, 관청에서도 다시 내놓지 않게 된다. 백성들이 가지고 있으면 보관한 것을 보내게 하여 그 가격을 낮게 맞추었고, 바르지 못한 것이 없어지게 했다."(<진서.식화지>)
이는 짐바브웨와 유사하다. 돈은 모조리 손권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동오의 백성들은 모두 순민이 아니었다. 그들이 반항했다. 이런 대전행위에 엄중하게 항의한 것이다.
손권은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급히 대전주조를 멈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일정비율로 규제하여, 백성들이 가진 대전을 오수전으로 바꾸어가도록 했다.
당연히, 대천오백이라고 하여 오수전 500개를 주지는 않았다. 일정한 비율로 교환해 주었다. 그것만 해도 손권이 크게 선심을 쓴 것이다.


4. 오수전의 가치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전을 주조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천재지변으로 오수전의 가격은 계속하여 하락한다. 당시의 필수품은 부동산이 아니라 양식이다. 배부르게 먹는 것이 백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바램이었다.
위문제는 황초2년 오수전을 폐기하고, 백성들이 곡백(穀帛)으로 시장에서 교환하게 한다. 위명제에 이르러, 동전을 없애고 곡백을 쓴지 오래되자, 사람들은 교묘하게 장난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젖은 곡식으로 이익을 보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견(絹)으로 거래를 했다. 비록 엄한 형벌로 처벌하였지만 금지되지 않았다. 사마지(司馬芝)등이 조정에서 크게 의논하여, 동전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형벌도 줄일 수 있으니 지금 다시 오수전을 주조하면 나라도 부유해지고 형벌도 줄일 수 있으니, 국가의 일처리에도 편리하다고 판단한다. 위명제는 그리하여 다시 오수전을 주조하고 진나라때도 사용하며, 고치거나 새로 만들었다는 말은 없었다. <진서.식화지>
오늘은 10전으로 쌀 한가마니를 사지만, 내일은 20전으로 쌀 한 가마니를 살 수도 있다. 그리고 매일 구매할 수 있는 쌀의 수량은 유한하다. 즉, 백성들의 집에 양식을 저장하고 있지 않으면, 매일 물가상승의 재난이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모두 마대로 돈을 들고가서 물건을 사야 한다. 유비와 손권은 이런 상황을 보고 아이디어를 내서 대전을 주조하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오수전은 우리의 대전으로 바꾸어 가라. 그렇게 되면 너희는 대전으로 거래할 수 있다. 대전은 조금만 가지고 다녀도 된다. 그러니 좋지 않은가? 이 이유는 그럴 듯하긴 하다. 만일 표준적인 순민이라면, 단기간내에 거기에 숨겨진 이해관계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기실 여기에서의 문제는 대전이 정말 대전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대전을 발행하는 정권은 정말 신뢰할만한가라는 것이다. 만일 유비집단이 정말 천하를 통일한 정권이라면, 이 돈은 전국각지에서 유통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유비의 건위오수는 촉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손권의 대천오백은 강동에서만 유통된다. 바꾸어 말하면, 촉한의 상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건위오수로 동오에 가서 양식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동오의 상인도 가지고 있는 대천오백으로 촉한으로 가서 양식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건위오수와 대천오백간에는 서로 교환의 가능성이 없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이 가진 대전은 갈수록 많아지는데, 유비, 손권의 주머니는 오수전으로 가득차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오수전을 점점 빼앗아간 셈이고, 백성들에게는 그다지 구매력이 없는 대전을 남겨준 것이다. 대전은 확실히 휴대에 편리하지만, 유통에는 불리하다.


5. 조비는 오수전을 유지했고, 그래서 그의 강산은 공고했다.
제갈량은 온갖 방법을 써서 조위의 강산을 멸하고자 했다. 그러나 왜 배수거신(杯水車薪)의 느낌일까? 기실 그건 아주 정상적이다. 조위의 백성들은 평안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위의 경제는 극히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촉한은 지방정권으로 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든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건 바로 조비이다. 이전에 동탁이 대전을 주조했던 일이 있다. 그것으로 북방집단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이했었다. 그 어떤 화폐도 북방에서 유통되지 못했다. 오직 오수전만이 약간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비가 등극한 후,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수전을 폐지하지 않고, 계속 이 화폐를 사용한다. 일정한 시간동안 백성들의 안정을 보장해준 것이다.
그러나 조위도 마찬가지로 식량감산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런 문제에 부닥쳤을 때, 조비도 참지 못하고 대전을 발행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수전을 쓸 수 없다면, 아예 백성들에게 돈으로 거래를 하지 말도록 한다. 물물교환을 진행하던 시대도 있었다. 시장이 자유로운 시장이면 되는 것이다. 조비가 오수전을 고집한 것은 심지어 단기간내에 물물교환방식으로까지 진행시킨 목적은 간단했다. 조비는 이런 방식으로 촉과 오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역시 조비의 곁에는 고수들이 있었다. 그들이 조비에게 한 건의는 화폐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백성들의 정권에 대한 신뢰의 기초이다. 그래야 정권이 발행하는 화폐에 신뢰를 가진다. 일단 화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 정권은 오래 갈 수가 없다. 이런 상황하에서, 촉한과 동오는 모두 크게 타격을 입는다. 오직 조위만이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 화폐가 삼국의 앞날을 결정했고, 조위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비록 마지막에 천하를 통일한 것은 사마씨가족이지만, 사마씨가족은 조씨의 모든 기업을 그대로 승계했다. 조비의 화폐제도를 포함해서. 그래서 당시의 조위가 가장 강대했던 것이다.
촉한을 보자. 여러 해동안의 소모로 일찌감치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화폐정책의 실패로, 촉한의 내부소모는 아주 컸다. 경제가 낙후하는 동시에 백성들도 조정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는다. 동오는 약간 좋았다. 그 원인은 손권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후에 과감하게 대전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동오는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천하를 통일한 조위는 기실 화폐정책이 가장 안정적이었던 국가이다. 조비는 시종 오수전의 사용을 견지했다. 그 자체는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누가 합리적인 화폐정책을 쓰는지가 누가 전장에서 승패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확실히 촉한은 이 점에서 가장 엉망인 정권이었다.

동오(東吳) 역사상 3차례의 탁고(托孤): 1차례 성공, 2차례 실패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223년, 유비(劉備)는 백제성(白帝城)에서 탁고(托孤)한다. 같은 해,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 두 탁고대신은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즉위시킨다. 나중에 이엄은 제갈량과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파면당한다. 다만, 촉한은 제갈량의 통치하에 국력을 회복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조위에 적지 않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벡제성탁고는 비교적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동오의 역사에서도 3차례의 탁고가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성공했지만, 두번은 실패하고 만다.


1. 손책탁고(孫策托孤)
건안5년 사월 사일(200년 5월 5일), 손책(孫策)은 단도산(丹徒山)에서 사냥하다가 허공(許貢) 문객의 암살을 당한다. 손책은 상세가 엄중했고, 스스로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장소(張昭)등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다시 손권(孫權)을 불러 인수(印綬)를 그에게 넘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강동의 병사들과 무리를 이끌고 양진의 사이을 오가면서 천하를 횡행하고 쟁패하는데는 네가 나보다 못하다; 그러나 현명한 인재를 기용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골라, 그들에게 각자에게 맡는 임무를 맡겨 강동을 지키는데는 내가 너보다 못하다." 그리고 밤이 되어 손책이 사망한다. 나이 26살이었다.
손책의 안배에 따라, 장소와 주유(周瑜)는 함께 탁고대신이 되어 손권을 보좌하여 즉위시킨다. 이 두 대신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젊은 손권이 손조롭게 강동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아니라, 동오의 강역도 확장했다. 229년, 손권은 무창(武昌)에서 황제로 등극하여 정식으로 조비(曹丕), 유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2. 손권탁고(孫權托孤)
신봉원년(252년) 정월, 손권은 다시 손화(孫和)를 남양왕으로 봉하고, 그의 자식인 손분(孫奮), 손휴(孫休)를 제왕(齊王), 낭야왕(琅邪王)에 봉한다. 이월,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신봉으로 고친다. 그의 병이 위중해지자 제갈각(諸葛恪)과 중서령 손홍(孫弘), 태상(太常) 등윤(滕胤), 장군 여거(呂據), 시중 손준(孫峻)으로 하여금 손량(孫亮)을 보좌하여 즉위하도록 부탁한다. 
같은 해 사월, 손권이 내전에서 사망한다. 향년 71세이고, 재위23년이다. 시호는 대황제이고, 묘호는 태조이다. 칠월, 장릉(蔣陵)에 안장한다. 손권은 태자 손량에게 5명의 탁고대신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이들 다섯 탁고대신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서로 싸우게 된다.
손권이 죽은 후, 손홍은 원래 제갈각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손권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속이고, 조서를 고쳐 제갈각을 제거하려하나, 손준에게 들켜 실패한다. 나중에 제갈각은 손홍에게 정무를 논의하자고 부른 후, 그를 죽여버린다. 253년, 손준은 황제 손량과 연합하여 다시 제갈각을 제거한다. 
256년에 이르러, 등윤과 여거 두 탁고대신도 손준에게 제거된다. 손준은 권력을 장악한 후, 종친을 대거 죽인다. 폐태자 손화, 손권의 딸 손노육(孫魯育), 선태자(宣太子) 손등(孫登)의 아들 손영(孫英)이 차례로 피살당한다. 태평원년(256년), 손준은 위나라를 정벌하는 도중에 병으로 사망하니 당시 나이 38살이었다. 그는 후사를 당제(堂弟) 손침(孫綝)에게 맡긴다. 손침은 손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그는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였을 뿐아니라, 황제 손량까지 폐위시킨다. 그리하여 손권이 고심하여 안배한 탁고는 철저하게 실패로 끝난다.


3. 손휴탁고(孫休托孤)
태평3년(258년), 손침이 쿠데타를 일으켜, 손량을 몰아내어 회계왕(會稽王)으로 끌어내리고, 손휴(孫休)를 모셔와 황제에 앉힌다. 손휴는 세번 사양한 후에야 즉위한다. 연호는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손휴가 등극한 후, 손침은 승상(丞相)이 된다.  손휴는 장포(張布), 정봉(丁奉)과 모의하여 손침을 제거한다.
영안7년(264년), 손휴의 병이 위중해진다. 그는 조서를 내려 승상 복양흥(濮陽興)을 입궁하게 한다. 그리고 태자 손출(孫出)로 하여금 복양흥을 맞이하게 한다. 손휴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복양흥의 팔을 꽉 붙잡고, 태자를 가리키며, 그와 장포에게 탁고한다. 즉, 손휴는 복양흥과 장포 두 사람을 탁고대신으로 임명한 것이다.
영안7년 칠월 이십오일(264년 9월 3일), 손휴가 사망하니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손휴가 사망한 후, 태자는 아직 10살정도였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은 좀더 나이많은 황제를 옹립하자고 요구한다. 그리하여 복양흥과 장포는 손휴의 뜻을 어기고, 그의 질손(侄孫)인 손호(孫皓)를 황제로 옹립한다. 나중에 두 사람은 손호에게 구실이 잡혀 처형당한다. 손휴의 황후와 태자도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하여 동오에서 있었던 제3차탁고도 큰 실패로 끝난다. 더욱 관건적인 것은 복양흥과 장포가 옹립한 손호는 더더욱 잔혹하기 그지없는 황제였던 것이다. 손호가 재위하는 동안 동오는 쇠락의 길을 걸었고, 결국 280년 서진에 멸망당한다. 이는 삼국시대가 철저히 종식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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