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개물(天工開物)>과 <해국도지(海國圖誌)>
<천공개물(天工開物)>과 <해국도지(海國圖誌)>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사학자 황인우(黃仁宇)의 말에 따르면 만력15년(1587년)은 그저 중요하지 않은 한 해였다.
강서(江西) 사람 송응성(宋應星)은 바로 이 중요하지 않은 해에 태어난다.
1. 송응성이 출생할 때, 집안과 국가는 모두 쇠락하고 있었다. 국가보다 더 빨리 쇠락한 것이 그의 집안이었다. 3대에 걸쳐 상서(尙書)를 지낸 빛나는 가족이 아무런 희망도 없는 보통가족으로 전락하는데는 겨우 3,4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송응성은 소년천재였다. 한번 보면 잊지 않았다. 다만 이런 능력은 그 스스로의 운명, 가족의 운명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의 평생동안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바로 형인 송응승(宋應昇)과 강서향시(江西鄕試)에서 나란히 합격해서 거인(擧人)이 된 것이다.
그 후, 그는 5차례에 걸쳐 북경으로 가서 진사에 도전했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방법이 없었다. 청운의 뜻은 가졌으나, 그는 평생 현성교유(縣城敎諭)라는 권한도 돈도 없는 직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시종 현실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주 밤낮없이 글을 쓴다.
개략 5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책이 인쇄된다. 이때 그는 세상사람들에게 말한다:
"상재(傷哉), 빈야(貧也)! 욕구기고증(欲購奇考證), 이핍낙하지자(而乏洛下之資); 욕초치동인상략응진(欲招致同人商略膺眞), 이결진사지관(而缺陳思之館). 수기고루견문(隨其孤陋見聞), 장제방촌이사지(藏諸方寸而寫之), 기유당재(豈有當哉)!"
쉬운 말로 번역하자면 이러하다: 가난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나는 참고될 자료를 구매할 만한 돈도 없고, 사람을 모아서 널리 의견을 들을 여건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저 이렇게 써낼 수 밖에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 일인가!
그래도, 그의 친구 도백취(涂伯聚)가 그의 책을 인쇄출판해주었다.
이 해가 1637년이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역사학자들은 1637년을 얘기할 때면 항상 이 특별한 연도를 강조한다. 이 해에 동방과 서방에서 각각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주는 책이 출판되었다고.
하나는 유럽근대철학의 기반을 닦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고, 또 다른 책은 바로 송응성의 <천공개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두 권의 위대한 책은 운명이 전혀 달랐다. 전자는 이성주의의 깃발을 세웠으녀, 과학실천을 통해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과학기술문명의 서광을 서방에 환하게 비추게 된다.
그리고 후자는 롤러코스트같은 전파여정을 열게 된다.
2. 송응성은 기인(奇人)이다. <천공개물>이 세상에 나온지 300년이 지난 후, 지질학자 정문강(丁文江)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사대부의 심리는 내용이 건조하고 무미하여 불모의 사막과도 같다. 송씨는 혼자서 다른 길을 열어 명나라 유생의 누습을 따르지 않고, 인민의 일용 음식 기구의 근원을 추구하여, 그 활력의 위대함, 구조의 크기, 관찰의 풍부함이 명나라에서 오직 그 한 사람 뿐이다.
이 평가는 거의 송응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정도이다.
<천공개물>은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명나라에서 오직 그 한 사람뿐이다(有明一代, 一人而已)"라는 극히 높은 찬양을 받게 되었을까?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대량의 농업, 공업에서 필요한 배육(培育), 생산지식을 모아서, 과학보급체계를 형성했고, 의식적으로 수치를 기록하여, 책을 더욱 실용적이게 만들었다.
서방인들은 이 책을 "중국 17세기의 공예백과전서"라고 불렀다.
이 책의 초판때, 국내의 판매량을 그다지 많지않았다. 몇년이 지나, 대명이 멸망한다. 청나라초기, 양소경(楊素卿)이라는 복건성의 서상(書商)이 이 책을 발견하고, 그가 다시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천공개물>을 알고 읽게 되었다.
송응성이 이 책을 쓴 목적은 실학을 통해 부국강민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뼛속까지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는 대책을 내놓을 생각이었다.
명나라말기의 사상, 경제 그리고 과학발전의 추세는 실제로 서구에 뒤지지 않았다. 당시, 자본주의의 맹아가 강남에서 나타났고, 일부 사상가들은 인간성의 해방을 주장했고, 또 일부 사람들은 실용주의를 제창하며, 이전의 도덕적 구속을 벗어나고 더 이상 과학기술을 "기기음교(奇技淫巧)"로 보지 말것을 창도했다.
그들은 현지를 고찰하고, 수집정리하고, 수치를 기록하고, 귀납분류하는 등의 방법으로 과학기술저작을 써냈다. 예를 들어, 지리학에는 서하객(徐霞客)의 <유기(遊記)>가 있고, 약물학에는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이 있고, 수리공정학에는 반계훈(潘季訓)의 <하방일람(河防一覽)>이 있고, 농학에는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가 있었다.
모두 공인하는 바는 송응성의 <천공개물>이 이 실학조류의 집대성이라는 것이다.
만일 청군이 중원으로 진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강옹건(康雍乾, 강희, 옹정, 건륭)시기에 시대를 역행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명나라말기의 발전추세를 보면, 중국은 아마도 서구와 유사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역사에 가정은 없다.
명청교체이후, 명말에 과학기술을 중시하던 조류는 점점 사라지게 된다.
<천공개물>의 삽화
3. 송응성 <천공개물>은 청나라초기에 잠깐 인기를 끈 후, 돌연 소리없이 사라지고, 절판된다.
그 본인은 빈곤 속에서 말년을 보내고, 개략 강희5년(1666년) 세상을 떠난다. 임종때, 그는 일생의 경험교훈을 "송씨가훈(宋氏家訓)>으로 써서 자손들에게 남긴다: 첫째, 과거에 참가하지 말라. 둘째, 관직에 오르지 말라. 그저 고향에서 농사짓고 글을 읽으면서, 선비의 전통을 후세에 전하라.
그는 다행히 제때 죽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큰 기대를 걸었던 책이 그렇게 냉대받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건륭시기, 조정은 <사고전서>를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의 도서를 대규모로 심사한다. 원레 유통되던 많은 서적은 이 '위대한 문화공정'이후 역사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실종'되어버린다.
엄격히 말해서, <천공개물>이 금서가 되어 폐기된 것은 아니다. 그건 그저 사고관(四庫館)의 신하들이 방치해두고 신경쓰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좋은 책을 왜 조정은 무시했을까?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 <사고전서>에 수록되는 서적은 전통적으로 존경중사(尊經重史)하는 전통에 따라, 과학기술서적은 중시하지 않았다. 둘째, 송응성은 이 책에서 명왕조를 숭상하고, 여진족을 멸시했다. 그리하여 정치적금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사고전서>에 수록되지 못한 것 자체는 그다지 무서운 일이 아니다. 더욱 무서운 일은 수록되지 못한 후의 운명이다.
<사고전서>의 태도가 관방의 여론동향을 좌우하기 때문에, <천공개물>은 정치적으로 부합격인 서적으로 취급된 것이다. 정치정확의 주도하에, 그리고 문화의 권력통제하에, 다시는 누구도 감히 이 책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문화적 고압의 결과 <천공개물>은 중국에서 근 300년간 소실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책이 중국에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는 아주 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공개물>은 유럽에서 12개국언어로 번역되고 널리 보급된다. 유럽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직접적으로 유럽의 농업혁명을 추진시켰다." 송응성은 "중국의 디드로"로 불린다. 디드로는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로 백과전서파의 대표인물이다.
일본에서, 이 책은 17세기에 유입된 후, 아주 인기를 끌어, 계속하여 재판이 나오고 새로 인쇄출판되었다. 이 책은 일본에서 부국제민의 "개물지학(開物之學)"으로 유행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 책을 "식산흥업(植産興業)"의 가이드라인으로 떠받들며 아주 실용적으로 활용했다.
민국시기에 이르러 이 책은 다시 중국으로 전해진다. 중국인들은 일본의 판본을 통해, 비로소 원래 중국에 이런 위대한 책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이런 일이 한번 발생했다는 것만으로는 명청조 통치자들의 우매함을 증명하는데 부족하다. 반드시 두번은 발생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슬픈 점이다.
시간은 이미 흘러 도광23년(1843년)에 이른다. 아편전쟁후, 대청은 천조상국의 환각에 빠져 영국에게 크게 얻어맞았다. 돈도 배상하고, 땅도 할양하고, 참통하기 그지없었다.
이 해에 호남(湖南) 사람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誌)>가 양주(揚州)에서 인쇄출판된다.
이 책은 최초로 전면적으로 그리고 계통적으로 천조이외의 세계상황을 기술했다. 각국의 지리뿐아니라, 외국의 조선기술과 무기생산까지 최대한 완벽하게 논술했다.
대청이 패전했을 때, 이런 대작을 출판한 것은 당연히 폐관쇄국에 익숙해져 있는 중국인들에게 외부세계를 위한 창문을 열어주기 위함이었다. 소위 "지피지기(知被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것이다. 이 고훈은 아직도 유효했다.
그러나, 위원은 너무나 천진난만했다.
이 책이 출판되자, 완고파들은 온갖 비난과 욕을 한다. 그들은 책에서 서방오랑캐를 '찬양'하는 말들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자존심은 너무나 강해서 외국이 좋다는 말은 한 마디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 속에, 아편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천조는 여전히 천조이고, 오랑캐는 여전히 오랑캐라는 것이다. 세상은 전쟁 한번으로 바뀌지 않는다.
어떤 관리는 <해국도지>를 모두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고하게 비난을 받게 된 <해국도지>는 국내에서 겨우 1000책 정도 발간한 후, 금서가 된다.
나중에 이 책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가 되어버린다. 좌종당(左宗棠)은 안타까워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해국도지>가 세상에 나온지 20년이 되었는데, 중국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고, "모든 것이 옛날과 같다(事局如故)"
5. 위원이 공개적으로 <해국도지>를 간행했는데, 그건 실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특히, 그는 책에서 "사이장기이제이(師夷長技以制夷)"(오랑캐의 뛰어난 기술을 배워서 오랑캐를 이기자)라는 구호를 내놓는다. 그리하여, 걸핏하면, "어르신이 천하제일이다"라고 외치는 제국통치자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임칙서(林則序)같이 영국에 대한 강경파조차도 중국과 영국의 현격한 실력차이를 느끼고나서는 침묵을 선택한다.
정치경험이 풍부한 임칙서는 일찌감치 깨달았을 것이다: 잠든 척 하고 있는 제국을 깨울 수는 없다.
유배를 가기 전날 밤, 임칙서는 이전의 막료였던 위원과 길게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 편찬을 완성하지 못한 <사주지(四洲誌)>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위원은 용감하게 들고 일어났고, 그리하여 <해국도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위원이 당시 그가 죽은지 20년이후, 광서연간에 같은 고향사람의 운명을 알았다면 그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그의 호남 고향사람은 바로 곽숭도(郭嵩燾)이다.
주영공사를 맡은 후, 곽숭도는 일기에서 영국에 대한 좋은 평가를 써놓고, 양복을 입고, 서양인의 예절을 배운다. 그의 이런 행동은 관민 양쪽의 분노를 산다.
호남 장사에서 향시를 준비하던 시험생은 곽숭도가 복구한 옥천산림사(玉泉山林寺)를 불태워버렸을 뿐아니라, 그의 집까지 불태워버리고, 그의 호남관적을 박탈하겠다고 소리친다. 심지어 곽숭도의 오랜 친구인 유곤일(劉坤一)까지 그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무슨 면목으로 호남으로 돌아올 것인가. 더더구나 천하의 후세인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인가"
알아야 할 점은 <해국도지>의 초판은 30년전에 나왔다. 위원은 체포되지도 않았고, 그저 그의 책만 금서가 되었다. 그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6. 그러나, 일본인들은 <해국도지>를 처음 보고 보물로 여기며 흥분했다. 대청치하의 중국은 확실히 불행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해국도지>초판이 나온지 8년후인 1851년, 중국상선 1척이 나가사키항으로 진입한다. 일본관리는 통상적으로 금지물품이 있는지 조사하다가 3부의 <해국도지>를 발견한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이 책에 빠진다.
당시, 흑선사건(黑船事件)으로 일본은 중국과 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다. 열강은 일본에 침략의 손길을 내밀었고, 일본의 뜻이 있는 인사들은 출로를 찾고 있었다. <해국도지>의 출현은 마침 시기를 잘 만난 것이다.
일본인은 이 책을 통해 "세계에 눈을 뜬다"
삽시간에 <해국도지>는 일본관리와 학자들이 연구하고 읽어야 하는 경전이 되어버린다. 너무나 베스트셀러여서 책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짧은 몇년만에 이 책의 가격은 3배로 뛰게 된다.
일본유신파인사는 이 책을 '필독서'로 보았고, 위원을 '해외동지'로 불렀다.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등은 모두 이 책의 영향을 깊이 받는다. 양계초(梁啓超)는 나중에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해국도지>가 간접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이와 동시에, 중국에서는 병부좌시랑 왕무음(王茂蔭)이 황제에게 <해국도지>를 추천했고, 널리 인쇄하여 간행하도록 건의한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한탄이 나오게 된다:
"오호라, 충성심과 지혜가 있는 인사가 쓴 우국의 저서를 그의 군주는 쓰지를 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에서 중시되다니, 나는 묵심(默深)을 위해 슬퍼할 뿐아니라, 청나라황제를 위해 슬퍼한다."
근대국가의 경쟁과정에서 중국은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청조황제와 관료계층이 보편적으로 무기력했을 뿐이고,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과신하고 외국을 배척했다. 그리하여 계속하여 변혁을 이룰 기회를 놓쳤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일전쟁에 이르러, 중국은 일본에 눌린다. 사상인식의 차이는 마침내 양국의 실력차이로 드러났다.
나중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 중국을 당당하게 방문했을 때, 일본이 성공한 경험을 묻자, 그는 담담하게 한 마디 했다: "당신들은 마땅히 <해국도지>를 잘 읽어보아야 한다!"
아, <천공개물>에서 <해국도지>까지, 대청제국이 스스로 버린 보물이 너무나 많다. 마르크스조차도 더이상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날카롭게 이 제국의 말로를 예언하지 않았던가:
인구가 거의 전인류의 3분의 1을 점하는 대제국이 시류의 흐름을 돌보지 않고, 현상에 만족하며, 인위적으로 다른 세상과 담을 쌓았다. 그리고 천조가 좋고 아름답다는 환상에 빠져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이 제국은 생사의 결전에서 반드시 무너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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