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큰선비
조선 중기의 큰선비
철학자 김인후하서의 학문적 위상
하서 김인후 선생에 대한 후대의 평가 중 한 문장으로 잘 압축한 표현은 “도학과 절의와 문장에 뛰어났다”라는 말이다. 그 첫 번째가 되는 도학에 뛰어난 사람은 그 당시 언어로는 도학자나 성리학자, 요즘 말로는 철학자나 사상가를 가리킨다.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16세기 조선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대립 시대인 동시에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체계 정비를 마무리한 토착화의 시기였다. 하서는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지조를 지키며 살다 간 문신이자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다. 하서의 학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사후 200여 년이 훨씬 지난 정조 시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해 마침내 문묘에 배향되었다. 하서는 어려서 기묘사화 때 세력이 꺾인 사림의 영향 속에서 학문 수업을 했고, 성장해서는 성균관에 들어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당시는 기묘사화의 영향으로 ≪소학≫이 기피되고 학문의 분위기가 침체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서는 성균관에서 만난 퇴계 이황 등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며 사림의 기풍을 조장하고자 노력했다. 과거급제 후 5년이라는 짧은 관직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 생활을 할 때 가장 힘쓴 일은 학문 연구였다. 하서는 기묘명현의 사상을 계승한 학자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관이나 방법론 또한 기본적으로 주자학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학문 입문 단계에서 도학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소학≫을 중시했고, 사서삼경 중에서는 ≪대학≫을 가장 중시했다. 또 하학상달下學上達이라 하여 매우 쉬운 책부터 형이상학적인 어려운 책으로 차근차근 공부해 나갈 것을 실천하고 권했다.
조선 후기의 개혁 군주이자 성군으로 손꼽히는 정조는 하서를 문묘에 배향하면서 선생을 “해동의 주렴계”라고 일컬었다. 해동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고, 주렴계는 염계 주돈이를 지칭한다. 염계는 중국의 북송 시대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제창한 유학자이다. 정조가 하서 선생을 조선에서 성리학을 처음 제창한 학자나 다름없다고 보았다는 의미다. 정조는 또 선생이야말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두루 갖추었다고 평가했다. 하서 신도비문을 지은 우암 송시열이 이미 그러한 평가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처럼 조선 왕조시대를 살고 간 하서는 성리학의 대가이자 도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성리학과 도학이 완벽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두 말이 유의어 관계인 것은 분명하다. 굳이 도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살펴보자면, 도학은 인간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성인聖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면서 종교적 성격을 약간 드러낸다. 이에 비해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덕적 실천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철학적 성격을 드러낸다. 이렇게 도학이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조선에서는 11대 왕 중종의 등장과 함께 조정에 참여한 정암 조광조 등 신진 사림파가 내세웠던 학풍이었다. 그 취지는 고대 중국의 요·순 임금이 행하였던 태평성대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학의 근본정신을 배우자는 데에 있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공통적 학문 특징이며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과 궤를 같이한 하서의 학문과 사상은 이기론, 도덕론, 수양론 등으로 구성된다. 하서의 이기론은 만물의 근본 원리인 이理와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인 기氣가 서로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통해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서는 이렇게 이기를 포괄하는 학자였지만, 그가 여러 차례 주기론을 비판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주리론자라는 견해도 있다. 하서의 도덕론은 인간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도덕적 본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양론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경敬과 성誠을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조선 중기 도학자 하서에 대해서는 현대에 접어들어서도 관련 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현시점에서 볼 때 한국 유학사에서 하서가 점하는 위상과 사상적 지위도 대체로 밝혀진 상태라 말할 수 있다. “하서는 퇴계, 고봉과 더불어 성리학의 개화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성리학 발전의 제1세대로 일컬어지게 된다.”는 최근덕의 평가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현상윤의 ≪조선유학사≫에 이미 나타난다. 현상윤은 이 책에서 저명한 성리학자로 서경덕, 이황 등 10인의 학자 안에 김인후를 포함해 소개하고 있다. 이황, 이이 전후의 일반 명유에 포함하지 않고 저명한 성리학자 10인에 포함했다는 의미는 김인후를 조선 성리학 태동기의 핵심적 인물로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이병도의 ≪한국유학사≫도 하서를 ‘퇴계와 동시대의 학자들’ 사이에 배속시켜 소개하고 있다. 최영성의 ≪한국유학사상사≫는 주리 vs 주기의 도식은 채택하지 않았지만,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서술하되 김인후를 비롯한 그 외 많은 인물을 ‘퇴계 율곡 전후의 명유’라는 항목에서 소개하고 있다.
성리학이 뿌리내린 과정
조선은 하서가 태어나기 120여 년 전에 성리학자가 주축이 되어 역성혁명을 일으켜 개국한 나라다. 태조 이성계는 무장 출신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을 설계하고 운영한 태종 이방원, 정도전, 조준, 권근 등은 신진 유학자로서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다. 고려 말기에 중국에서 건너온 성리학은 신흥 왕조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뿌리를 내렸다. 동양 3국 중 마지막으로 일본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을 통해 받아들인 성리학을 지배계급부터 수용하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은 중국에서 넘어온 성리학이 선진 시대의 유학에 비해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너무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철학론이라고 했다. 사실 선진 시대의 공맹 유학은 우주의 생성, 천도, 인간의 본질 규명 등에 관한 논의에는 중점을 두지 않았다. 천하 질서 유지를 위한 실천 윤리학 내지는 정치학의 영역이 선진 유학의 요체였다. 그러던 것이 북송 시대 주염계의 ≪태극도설≫을 시발로 정명도, 정이천, 장횡거 등을 거쳐 남송의 주자에 이르러 정교한 논리적 체계를 갖춘 철학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른바 주자학이요 신유학이다. 주자는 주염계의 태극, 정이천의 성즉리性卽理, 장횡거의 기론氣論을 이어받아 집대성하여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지닌 성리학을 완성하였다.
“성리학의 근본은 이理다. 이는 천지 만물의 근원이다, 이에서 기가 생기고, 기氣 즉 음양오행이 천지 만물을 낳는다. 이는 기의 본체지만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는 항상 기와 함께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깃든 이를 성性이라 한다. 성에는 타고난 그대로의 이理인 본연지성本然之性과 몸뚱이가 지니는 기의 요소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다. 본연지성이 지선至善한 것인데 비해 기질지성은 정이나 욕에 끌리어 불선不善에 흐르기 쉽다. 그러므로 정이나 욕을 억제하여 본연지성을 보존하기 위해 삼가고 조심하는 경敬에 힘써야 한다.”
조선은 개국 직후 중국 남송 시대에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의 정치철학을 장려하여 양반 사회의 학풍으로 굳어지게 하였다. 주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바탕으로 앞선 도학자들의 ‘성즉리’설을 집대성하여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바탕으로 한 인격의 수양과 실천을 강조했다. 주자는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참모습에 대하여 밝게 알아야 하며(格物致知), 양심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면서 나쁜 마음이 스며들지 않도록 잘 살펴서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고(存養省察) 주장했다. 또 마음의 경건성을 유지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는 거경궁리居敬窮理와 타고난 본성을 지키고 욕망을 물리쳐야 한다는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慾의 수양법을 제시했다. 주자는 ≪가례≫를 저술해 의례를 확립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선에서도 실천윤리 수준에 머물렀던 선진 시대의 고대유교에 형이상학적 요소를 가미한 새로운 유학이 사대부층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성리학은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정몽주와 길재 계열의 이학파 성리학이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도전과 조준, 권근 계열의 경세파 성리학이다. 양자 모두 이기 철학을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를 배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학파는 관념적인 철학에, 경세파는 현실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 밖에도 조선왕조는 개국 초부터 ≪소학≫과 ≪주자가례≫를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하였다. 그 결과 성리학적 질서가 조선의 가족윤리·사회윤리가 되었다.
조선 중기에 활발한 논쟁을 거친 이기 철학은 알기 쉽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절대로 넘지 못할 높은 벽도 아니다. 편의상 이理란 우주 만물의 원리를 말하고, 기氣란 이理를 담는 그릇이나 재료라고 단순화시켜 보자. 학창 시절에 모두를 골치 아프게 한 주리론과 주기론도 이렇게 단순화해 보자. 주리론은 이理만 중요하다는 학설인 반면, 주기론은 이가 중요한 것은 인정하지만 기氣도 역시 중요하다는 학설로 이해하면 된다. 어쨌거나 인仁과 의義가 중심이 된 윤리 도덕만을 강조하던 공맹孔孟 시대의 고대 유학은 약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그것이 바로 우주와 인생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유교 철학으로 신유학이자 도학이자 성리학이다.
현실적으로 성리학은 단시일 내에 조선 사회의 지배 이념으로 뿌리를 내려갔다. 특히 조선 중기부터 정치와 사회를 주도한 세력인 사림士林은 성리학을 생활 속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훗날 성리학의 발상지 중국에서는 명에서 청으로 바뀌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양명학과 고증학이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중국보다 뿌리를 굳게 내리고 더 크게 발전했다. 그것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래종교인 불교가 인도·중국과 달리 우리 고유의 해동 불교로 발전한 사례와 패턴이 같다. 고려 시대에 불교가 국교였듯이 조선왕조는 ‘성리학의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조선은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성리학에 매달리는 오류를 범했다느니, 심지어 성리학 근본주의자들이 나라를 망쳤다느니 하는 억울한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서 선생 성리학 이론의 특징
① 실천을 전제로 한 이론 제시
하서가 평생 배우고 가르친 학문과 사상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멀게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공맹 유학이고 가깝게는 송나라 정주학 특히 남송의 주자학이다. 이른바 신유학新儒學이다. 우리나라 선현으로는 포은 정몽주, 정암 조광조로부터 내려온 학통을 이어받은 도학이다. 하서는 평생 유교의 경전을 연구하여 실천적 도학을 추구하였다. 안으로는 경敬으로써 올바른 마음을 갖고 밖으로는 의義로써 올바른 행동을 하여 마음과 몸이 일치하는 인격의 성숙을 이루자는 취지다. 선생은 특히 임금부터 왕도정치를 구현하는데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왕이 내 몸을 닦고 덕을 쌓아 어진 신하를 등용해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며, 소학과 삼강을 가르치는 데 힘쓰는 한편, 언로를 넓히고 바르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 시대 도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선생의 깊고 오묘한 학설로는 태극음양론, 사단칠정론, 인심도심설, 천명사상, 중화사상 등이 있다. 선생은 도학 이외에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 예학에도 밝았다고 전해진다. 우주관, 인성관, 수양론, 의리론, 경세론이 집약되어 있는 《천명도》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홍범설시작괘도》 《가례고오》 《백련초해》 등을 저술하였다. 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후 장성 대맥동 본가에서 발생한 화재로 서책을 많이 잃어버린 탓에, 현재는 ≪천명도≫ 그림과 《백련초해》만 남아 있다. 선생의 문집인 《하서집》은 사후 제자들이 만들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도학에 관한 하서의 저술은 적은 편이나, 생전에 충의로써 도학을 몸소 실천하였다. 왕이나 사대부는 도학을 학문 연구 대상으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라,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정치를 펼치는 데 있어서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에 따라 민본 위민의 경세 정치를 실현하여야 한다는 취지를 경연 석상에서 중종에게 상소하고 강론하였다.
선생의 생애 후반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 및 시문학 활동에 몰입한 시기이다. 을사사화 이후 은둔한 그는 몸을 추스른 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정진했다. 아울러 차례대로 힘써서 실천하니 만년에는 학문의 경지가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깊었다. 그리하여 하서는 퇴계 이황, 추만 정지운,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율곡 이이 등과 더불어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석학으로 손꼽힌다.

② 천인합일을 강조한 천명사상
하서는 1549년(명종 4년) 봄 2월 순창군 쌍치면 점암촌에 은거하면서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하사한 《주자대전》을 통독했다. 그중에서 주자의 《대학 강의》를 보고 뽑아내어 편집하고, 거기에 발문跋文을 붙였다. 발문이란 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말한다. 또 그 무렵 성리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나타내는 그림(도圖)으로서 매우 중요한 《천명도》에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하서는 추만, 퇴계와 더불어 특색있는 탁견을 제시해 성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천명이란 하늘의 명령을 가리키는 말이고, 천인합일을 도해한 천명도는 원래 추만 정지운이 처음 그렸다. 추만이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생기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생긴다.”라고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인 《천명도설》 초고를 완성했다. 1543년 추만은 같은 김안국 문인인 하서에게 자신이 작성한 천명도를 검토하고 수정해줄 것을 제안했다. 퇴계 이황에게도 같은 부탁을 했다. 하서는 이를 살펴보고 추만과 의견을 나눈 뒤 1549년 자신의 독자적인 천명도를 작성했다. 퇴계 이황도 추만과 하서의 천명도를 참조하여 1553년 자신의 천명도를 작성하고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1558년 최종본을 완성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각자 자신이 그린 천명도가 《중용》에 기반하여 작성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정지운이 천명이란 인간과 우주의 관계 속에 인간의 위상을 나타내는 그림의 대략적 구도를 그렸다면, 김인후는 여기에 인간의 길을 설정하였으며, 이황은 이를 종합하고 재구성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명도를 둘러싼 추만과 하서와 퇴계 사이의 심오한 토론은 뒷날 사칠논변四七論辨(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다. 원래 천명도는 천인합일 사상을 그림 언어로 나타낸 것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존재는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성性 즉, 본질을 이루고 인간은 동식물과 달리 도덕적 본성인 인의예지신을 가지고 태어나므로 도덕적 수련을 해야 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이를 위하여 도를 그리고 그 안에 문구나 용어를 배치하였다. 먼저 하늘(우주)을 상징하는 큰 원, 땅을 상징하는 네모, 사람을 상징하는 사람 모습 즉, 머리는 둥글고 몸뚱이는 네모 형태로 만들고 거기에 여러 문자를 안배하였다. 《추만실기》에는 추만의 도, 퇴계의 신·구 도, 그리고 하서의 도, 이렇게 4종의 도圖가 실려있다. 하서의 도에 나와 있는 ‘그림 언어’는 추만이나 퇴계와는 조금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서의 <천명도>는 하서 문집에는 실리지 않고, 추만 정지운의 《추만실기》에만 부록 형태로 실렸다. 그 이유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추만과 퇴계는 도와 도설을 따로 분리해서 남겼으나, 《추만실기》에 실린 하서의 천명도는 도만 있고 도설은 없다. 그렇지만 하서의 천명도가 하서 사상의 일단을 살피는 중요한 자료라는 것은 틀림없다. 여기에는 하서 선생의 도학 사상이 전체적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정조는 하서의 철학적 논문이나 저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평가하는 고충을 감수해야 했다. 천만 다행히도 천명도가 남아 있어 하서의 학설을 웅변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정조가 하서를 ‘동방의 주자周子’로 일컬을 만큼 하서의 천명도에 담긴 의미는 깊고 넓었다. 이와 관련하여 1549년(명종 4년) 추만 정지운이 순창에 있는 하서를 찾아와 자신의 천명도를 보여주고 떠나기 전에 하서가 그 천명도 뒷면에 남긴 글은 다음과 같다.
정추만 천명도 뒷면에 글을 쓰다
천명은 깊고 깊어 다함이 없고 낳고 낳는 이치는 잠시라도 그치거나 끊어짐이 없다. 이가 타고 있는 기틀(機)을 이른바 음과 양이라 하는데, 움직이고 멈추고 하면서 서로 뿌리가 되니 만물이 나란히 길러지고 서로 유통한다. 다만 형形과 기氣의 사사로움에 얽매여 이것을 능히 알지 못한다. 오직 천하에서 총명과 예지와 지극한 정성으로써 쉼 없이 타고난 성性을 다 발휘하는 자만이 마침내 기미幾微를 살필 수 있다. 이 그림을 만드는 데 있어 어찌 대수롭지 않게 엿보고 헤아리는 자들이 흉내 낸다고 될 일이겠는가. 나는 배움에 뜻을 두고 나아가지 못한 사람이라 이 그림을 펴보는 데 근심이 적지 아니했다. 정군鄭君 정이靜而(추만 정지운의 자字)가 곧 서울로 올라간다고 해서 서로 생각하는 정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우선 천명도 도면의 뒤에 글을 써 떠나는 사람에게 준다. 가정 기유년 가을 8월 하서 김 후지 씀
題鄭秋巒天命圖後
維天之命於穆不己生生之理未嘗間斷乘之機曰陰與陽一動一靜互爲其根萬物並育相爲流通但梏於形氣之思不能知之惟天下聰明睿知至誠無息能盡其成自乃能有以察其機焉是圖之作豈尋常窺測者所可擬爲余有志於學而未就者也披覽是圖不能無戚戚焉鄭君靜而朝夕還京千里相思無以爲言姑以是題其圖後面贐之嘉靖己酉秋八月下書金厚之書

하서 선생의 천명도
③ 중용적 실천을 중시한 중화사상
하서는 자신의 ≪천명도≫에서 인간 마음의 위치에 성性 대신에 중中이라고 하여 《중용》에 나온 중中의 의미를 그대로 가져왔다. 그 의도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주자와 육상산의 무극태극 논쟁을 참고하여 추론해 보면, 성이라고 하는 것보다 중이라고 하면 인간 마음의 역동성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또 사람의 본질인 내재된 천명을 마음과 관계없이 추상화하기보다 천명의 ‘내재성’을 좀 더 강조하는 표현이 된다고 본 것 같다. 이런 점을 하서 천명도의 특색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천명도란 우주 만물의 성정을 표현한 그림이다. 하서가 1549년 순창에서 그린 천명도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현세에 치중하는 우리나라 전통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간은 사단칠정의 원칙에 따라 선한 사고와 행동으로 천인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늘은 둥글게(天圓) 표시하고, 음양의 조화를 나타냈다. 땅은 흙색으로 네모지게(地方) 표시하였다. 천명은 남쪽을 향해 왼쪽부터 춘하추동과 동서남북을 따라 자연의 순환인 원형이정元亨利貞을 하늘의 도인 성誠이 감싸고 있다. 오행과 12간지로 방향과 시간을 나타냈다. 인간은 둥근 머리와 다리를 네모난 모습으로 도식화하였다. 또 인간의 다섯 가지 성품을 음양과 연결하여 이 성품이 두루 사방으로 통함을 나타냈다. 천인합일의 근거로서 찾고 있는 중용의 이념을 심성론에 적용한 하서의 천명도는 천명이 인간의 심성이며, 중화中和로써 천명과 조화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서의 도학 사상은 중용적 실천을 중시하고, 인성론적 성리학 이론의 기초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성誠을 표준으로 삼은 ≪중용≫의 중화사상을 윤리 실천의 기본으로 삼았고, 중화 개념을 주요 골자로 하는 독자적인 ≪천명도≫를 제시한 것이다. ≪중용≫은 원래 ≪대학≫과 함께 ≪예기≫ 49편 중에 있던 것을 송나라의 주희가 따로 뽑아내어 비로소 신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의 하나가 되었다. 저자에 대한 학설은 구구하나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와 그의 제자의 저작이라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다. 송대에 불교의 심성론이나 도교의 형이상학적 이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교 사상 자체 내에도 깊은 철학적 원리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으로 주목을 받았다.
중용中庸이란 한자어의 음훈을 살펴보면 中은 ‘가운데’ 중이고 庸은 ‘쓸’ 용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것,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말한다. 동양철학의 기본 개념으로 사서의 하나인 ≪중용≫에서 말하는 도덕론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중中’이며, 평상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용庸’이라고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중용에서 중은 양극兩極의 합일점이고, 용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송대의 학자 정이程頤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중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데 비하여, 용은 시간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서의 중화사상은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단계인 4~5년간 더욱 숙성된다. 하서는 1556년(명종 11년)에 서경덕의 ≪독역시讀易詩≫를 읽고 나서 하학下學을 소홀히 하고 돈오頓悟로 이끌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깨달음의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돈오설에 대해 꾸준한 수행과 실천을 강조한 점수漸修를 무시하는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황진이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일화를 남긴 화담 서경덕(1489~1546)은 성리학 중에서도 자연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자연철학이란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음양오행에 의해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일종의 자연학을 말한다. 주기론적 입장에서 자연의 현상과 이치에 관심을 많이 가진 화담이 주역에 관한 시를 남기자, 역시 주역에 관심이 있던 하서가 주기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화담의 시를 언급한 것이다.
1557년(명종 12년) 하서는 《태극도설》 《서명》 등의 글이 지닌 깊은 뜻을 생각하고 찾아서 읽기를 천 번에 달했다. 이에 이르러 《주역관상편》과 《서명사천도》를 저술했다. 전자는 주역에 관한 저술이고, 후자는 횡거 장재의 서명을 풀이한 저술이다. 현재 두 저술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안타깝다. 1558년(명종 13년) 서울로 과거 보러 가던 고봉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하서를 찾아와 그와 더불어 《태극도설》을 논하였다. 같은 해 10월 기대승이 문과에 급제하고, 그해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던 중 일재 이항李恒에게 들러 《태극도설》을 재강론했다. 이항이 “태극太極 음양陰陽이 일물一物”이라고 주장하고, 기대승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여 종일 토론하였으나 의론이 귀결되지 못했다. 이에 기대승이 하서를 찾아와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를 묻자, 그는 기대승의 의견이 맞다고 하며 종일토록 강론하다가 파했다.
또 소재 노수신盧守愼이 송나라 진백이 지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주해를 저술하여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에게 강의하고 질문한 것이 왕복으로 묶어 상당수였는데 퇴계 이황은 누차 자기 의견을 버리고 노수신의 설을 많이 따랐다. 여기서 소재 노수신은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고 하였으나 하서는 이를 비판하며 “마음이 몸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된다. 따라서 경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경敬을 “사려를 안정시키고 정신을 수렴하여 도덕성을 함양하는 도리”라고 정의하기도 했는데, 하서는 일찍이 ‘대책對策’에서 경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몸을 지배하는 것은 마음이고 마음이 몸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경敬입니다. 일은 이치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 이치는 마음속에 갖춰져 있습니다. 경은 마음을 지키고 이치를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문의 처음부터 성현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경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1559년(명종 14년) 태인에 사는 저명한 성리학자 일재 이항이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는 뜻의 글을 써서 고봉 기대승을 통해 보내오자, 하서는 건강이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다음과 같이 짤막하지만, 깊은 뜻이 담긴 답장의 글을 써서 보냈다. 일재 이항은김인후·기대승·안방준·박광일과 함께 ‘호남의 다섯 학자湖南之五學’에 꼽히는 인물이며 딸을 하서의 큰 며느리로 시집보내 서로 사돈의 인연을 맺은 사이다.
일재에게 보내는 글
기군奇君에게 보낸 서간에 대해 감히 이의를 제기 못 하겠으나, 대개 이와 기는 혼합하여 천지간에 가득 찬 온갖 것이 그 속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동시에 저마다 개성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을 떠났다고 일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도道와 기器의 나눠짐은 한계가 없지 아니한즉 태극과 음양이 일물一物이라 할 수는 없을 상 싶습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태극이 음양을 탄 것이 사람이 말을 탄 것과 같다”라고 한 즉,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병이 중하여 할 말을 다 못합니다.
與一齋書
遺奇君之柬。不敢議爲。蓋理氣混合。盈天地之間者。無不自其中出。而無不各具。不可謂太極之離乎陰陽也。然道器之分。不能無界限。則太極陰陽。恐不可謂一物也。朱子曰。太極之乘陰陽。如人之乘馬。則決不可以人爲馬也。病重不盡。
④ 이기理氣를 포괄한 대심大心철학
하서는 1559년(명종 14년) 겨울 고향에 내려와 있던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설을 강론하는데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봉은 퇴계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에 대해 깊이 의심하여 하서에게 질문하니, 그는 물 흐르듯 막힌 바 없이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극히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1501∼1570)은 그 무렵 이와 기에 대하여 “이가 발하면 기가 이를 따르고 理發氣隨” “기가 발하면 이가 기를 탄다 氣發理乘”고하여 이기호발을 주장했다. 하지만 고봉 기대승(1527∼1572)은 하서, 일재 등과 교감하며 이론을 가다듬은 후 퇴계 이황과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 논쟁을 펼쳐 유명해졌다. 한편 율곡 이이(1536∼1584)는 퇴계의 주장 중 “기가 발하면 이가 기를 탄다”는 명제는 맞지만 “이가 발하면 기가 이를 따른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이이는 이란 보편적인 것이고 기는 특수한 것으로 파악하여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 理通氣局”는 독특한 견해를 제시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서가 차원이 다른 도학자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서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는데, 원칙적으로는 퇴계처럼 이理를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된 이기이원론이 아니라 혼합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하서는 이기를 포괄한 대심大心철학자였다. 하서는 심心을 일신만사一身萬事의 주재자로 보았지만, 심에 내재한 이理를 타야만 주재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배타보다는 포괄, 분석보다는 회통會通을 중시했고 모든 사물을 같은 생명이라는 차원에서 교감했다. 이런 점에서는 퇴계 이황의 주장과 차이를 보인다.
이 밖에도 하서는 당나라 학자 이고李翺(774~836)가 저술한 ≪복성서復性書≫를 즐겨 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고는 국가 공인의 《오경정의》 주석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나 노장, 선학 같은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였다. 《복성서》는 인간의 본성을 논한 것으로 송대 정주학의 선구가 되었다. 인간 본성의 회복이 수양 철학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이고의 사상은 신유학의 도통사상 중시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서전집≫ 上권 92쪽에는 ≪복성서≫를 읽고 난 하서 선생의 소감이 실려있다. 특이하게도 글제를 ≪복성부復性賦≫라 이름 지으면서 “초고 속에 이 작품만 있고 이에 대한 글제는 없으므로 그 글 뜻을 자세히 관찰한 끝에 우선 이로써 글제를 하여 아는 자를 기다리는 바이다.”라는 사연을 밝혔다. 이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복성부
온갖가지 종류들이 태어날 적엔
하느님이 명해준 정성正性받았네.
건순健順과 오상五常을 갖추었으니
이야말로 이오二五의 어울림이라.
진실로 순선純善이요 섞임 없어서
혼연한 지리至理의 충융沖融이로세. (이하 생략)
復性賦
惟萬彙之稟生兮 受天命之正性
具健順與五常兮 寔二五之所倂
諒純善而無雜兮 渾至理之沖融

하서 철학의 계승 발전
하서가 생존했던 시기는 중종 대 초기에서 명종 대 중기에 이르는 기간이었으니, 중종반정으로 인해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림의 정서가 팽배할 때였다. 사림이 추구했던 도학 정신은 유학의 근본정신, 곧 참다운 도를 실현해 백성을 다스리고자 했던 이념이었다. 이는 충군 의리 정신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연산군의 학정으로부터 중종반정으로 인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한 사림의 이상으로서 형성된 시대정신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꽃을 피운 선생의 학문은 사림의 이론적 근거인 도학의 맥을 잇고 정암 조광조가 실천하다 좌절된 개혁을 진일보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하서는 수학 초기부터 정암 조광조 등 여러 도학자가 ≪소학≫에 의한 일상수양을 중시하던 학풍을 계승하였다. ≪소학≫이란 송나라의 유자징이 주자의 지시에 따라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1187년에 편찬한 수양서를 말한다. 내편 4권, 외편 2권의 전 6권으로 되어있다. 내용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았다. ≪소학≫은 유교 사회의 도덕 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것으로서 유학 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주자에 의하면 ≪소학≫은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며,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 된다고 비유하여 ≪소학≫이 인간 교육의 바탕이 됨을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소학≫이 중시된 것은 조선 초기부터이다. 이 책은 당시의 모든 도학자가 인격 수양의 지침서로 생각했다. 사대부의 자제들은 8세가 되면 유학의 초보로 이를 배웠다. 어릴 때부터 유교적 윤리관을 체득하는 아동 수신서로서 장려되어, 사부학당·향교·서원·서당 등 당시의 모든 유학 교육기관에서 이를 필수 교과목으로 다루었다. 특히 사림파들이 민중 교화의 수단으로 이를 권장하였으며, 하서의 스승 모재 김안국은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 ≪소학≫을 우리말로 번역한 ≪소학언해≫를 발간하여 민간에 널리 보급하기도 하였다.
또 하서가 ≪소학≫에 이어서 평생토록 특별히 연구한 학문은 ≪대학≫이었다. ≪대학≫은 유교의 경전으로, 논어, 맹자, 중용과 더불어 사서오경(혹은 사서삼경) 중 사서의 하나이다. 본래 《예기》의 제42편이었으나, 남송 시대에 성리학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중용》과 더불어 독립적인 텍스트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주희가 내용의 편차를 바꾸고, 주석을 덧붙이면서 완전히 독립되어 ‘사서’에 속하게 되었다. 이름만 보면 분량이 방대할 것 같지만 실은 1,700자 남짓으로 A4 한 장 내외에 원문 전체가 들어갈 정도로 짧다. 이 책은 개인의 인식론에서 기초하여 윤리학, 그리고 사회 및 정치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단일한 차원에서 통일적, 체계적으로 제시한 경전이다. 주희의 해석에 따르면 ≪대학≫은 성리학 교육체계에 있어서 “공부하는 방법”을 담은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서는 대학을 1,000번 넘게 읽었다고 전해진다. 제자에게도 대학을 버리고서는 도道에 이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대학을 읽지 않고 다른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마치 터를 닦지 않고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가르침이었다.
이처럼 ≪대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윤리나 철학을 담고 있는 유교 경전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서는 구시대적인 훈척 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림 정치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대학≫의 이론이 필요했기 때문에 강조했을 듯하다. 당시에 훈구파 재상들이 젊은 문신들을 내몰아 죽이거나 혹은 유배시키는 사회 혼란이 심화했는데 이러한 사회문제를 과감하게 지적한 것이다. 하서는 대학 한 권에 격물·치지·성의·정심의 공력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효험이 모두 들어있어 이것을 버리면 그 어떤 것도 정할 수 없다고 했다. 가장 아끼는 제자이자 사위인 조희문과 양자징에게 준 시에서 “대학을 반평생 공부해도 아직 근원을 찾지 못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대학을 가볍게 보지 말고 더 중시하라는 당부다. 하서 제자를 포함한 전라도 선비들이 훗날 임란 의병이나 구한말 항일 의병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뛰어든 것은 ≪대학≫에 담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원리에 따라 현실 문제나 모순 해결을 강조한 하서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하서가 타고난 자질이 문학에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으나, 성리학에 관한 것은 별로 없고 단편적인 것뿐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있다. 이는 하서가 남긴 1,600여 수의 시문 상당수가 도학을 주제로 쓴 도학시라는 사실을 간과한 피상적 접근이 아닌가 싶다. 또 하서 사후 발생한 장성 대맥동 본가 화재로 귀중한 저술이 많이 소실되었다는 점도 헤아리지 아니한 듯하다. 하서는 ‘훌륭한 학자’가 아니라 ‘훌륭한 시인’으로 만족해야 할 문장가라는 프레임 씌우기는 하서 본인은 물론 우암 송시열이나 정조가 들어도 이의를 제기할 만하다. 사계의 연구자 중에 더러는 “하서가 원래 태극이라든가 성리학의 이기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이론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서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읽는 데 힘이 다른 책 몇 배로 들고, 그래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대학)장구를 주자 (대학)집주와 (대학)혹문을 참고로 하여 읽고 있으나,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성벽이 시와 음주를 좋아하여 십여 년 허송세월하는 바람에 깊이 사색하면서 읽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신빙성에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다만, 하서의 학맥이 17세기 이후 독자성을 잃고 영남의 퇴계학파나 호서의 사계학파(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지는 학맥)에 흡수되어 위축을 면치 못했다는 지적을 후학들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서울은 물론 호남 어디에서도 ‘하서학’이나 ‘하서학파’라는 말을 거의 들어볼 수 없는 현실을 자성해야 한다. 다행히도 19세기에 장성에서 주리론 성리학자인 기정진 선생을 중심으로 위정척사의 기치를 내건 노사학파가 형성돼 유학이나 성리학의 맥은 제대로 이어왔다. 앞으로 호남의 유종인 하서의 학문도 퇴계학, 율곡학에 버금가는 도약의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본다. 하서의 철학과 사상이 기본 자료의 부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짜임새 있게 연구되기를 기대한다.
조선 중기의 큰선비
필암서원 산앙회
필암서원 산앙회는 하서 김인후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연구하는 학술단체 홈페이지입니다.
www.piramsana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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