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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석각"은 진시황(秦始皇)과 관련없고, 왕망(王莽)과 관련있다.

赤松子 - 내 블로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5.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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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석각"은 진시황(秦始皇)과 관련없고, 왕망(王莽)과 관련있다.

글: 갈승옹(葛承雍)

[청해 "곤륜석각"에 관한 학술논쟁이 지속되고 있어, 학계와 학술권을 넘어 사회에서의 논쟁까지 불러왔다. 저명한 유산연구(遺産硏究) 전문가이며, 문물출판사(文物出版社) 전 총편집인 갈승옹이 7월 16일 글을 실어, 청해 마다현 찰릉호 북안에서 발견된 석각이 진시황이 보낸 사신의 문물이 아니라, 나중에 왕망시기 사람을 보내 채약하고 선위(宣威)를 순시할 때의 석각이라고 보았다. 시대가 다르고 중간에 200년의 차이가 있다. 전대에 사라진 역사로 후대에 만든 석각문물을 해석하게 되니, 의문점이 많이 나오고,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동도(仝濤) 연구원이 청해 마다현 찰릉호 북안의 마애석각(摩崖石刻)을 조사하고, 석각의 내용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발견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필자의 생각에 동도의 공로는 아주 크다. 실로 그가 고생을 해서 야외조사를 하고, 직접 암벽에 새겨진 남은 흔척을 접촉하고, 풍찬노숙하며 새로운 지식을 찾아낸 점을 찬양한다. 다만 필자는 그가 석각문자를 해독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석각의 시대판단에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석각은 파손되어 완벽하게 남아 있지 않은 유감이 있다. "곤륜석각"으로 명명하는 것이 좋을지, "채약곤륜"으로 명명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실제로 새겨진 유물인지, 아니면 위조한 것인지, 학계와 학술권을 벗어난 사회의 토론을 불러왔다. 여기에는 진한사학자(秦漢史學者)들의 의문도 있다. 이번 토론은 단순한 학술논쟁의 범위를 넘어선다. 마치 전체인민이 참여하는 문화토론이 된 것같다. 필자는 살펴본 후에 약간의 건의를 하고자 한다. 흥미있는 동료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1995년 7월, 필자는 국가문물국의 위탁을 받아 청해의 비단길 문화유산신청사항을 고찰했다. 청해성 문물국은 고고학연구소의 몇몇 간부들로 하여금 나를 데리고 신청유적지를 고찰하게 했다. 중점중 하나는 한문화(漢文化)와 강(羌), 호(胡)문화교류융합의 특징을 고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단길 남로로 들어가 서역으로 향하는 중요도시 해안현(海晏縣) 서해군(西海郡) 고성(故城)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황수유역(湟水流域)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규모가 큰 한나라때 성유적이다.

해안현 서해군 고성 유적지

서해군고성에서 출토된 "서해안정(西海安定)" 와당

서한(西漢) 중엽이전, 청해의 대부분지구는 거의 강인(羌人)들이 거주하던 곳이고, 당시 한나라군대가 활동하던 지역은 황수의 하류유역에 한정되었다. 한무제 원정6년(기원전111년) 한나라장수가 병력 10만을 이끌고 하황지구(河湟地區)로 깊이 들어갔고, 강인을 쫓아낸 후, 한왕조는 호강교위(護羌校尉)를 설치하여, 전문적으로 강인을 관리하는 업무를 진행한다. 시원6년(기원전81년)부터 신작2년(기원전60년)까지 하황지구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전후로 금성군(金城郡) 관할하의 7개현(縣)을 설치하여, 정식으로 중원왕조의 군현체제내에 편입시킨다. 왕망(王莽)은 권력을 장악한 후, 강인을 초무하여 칭신하게 하고, 청해호 환호지구에 서해군(西海郡)을 건립한다. 서해구는 비교적 편벽한 유목지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유적들이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서해군 및 그에 예속된 5개 성(城)이 1983년에 발견된다. 서해군성은 규모가 가장 크고 역참과 봉화대가 있었고, 성안에는 여러 차례 왕망시대의 전폐(錢幣)와 전범(錢范)이 발견된다. 1940년대, 해안현 "삼각성(三角城)"고성에서 "서해군(西海郡), 시건국(始建國), 공하남(共河南)"이라는 9개의 전서로 글자가 새겨진 호형석각(虎形石刻)이 발견된다. 1987년에는 다시 저명한 "시건국호부석궤(始建國虎符石匱)"가 발견된다. 높이 약 2미터이고, 궤의 덮개에는 복호(伏虎)가 조각되고, "서해군호부석궤(始建國虎符石匱), 시건국원년십월계묘(始建國元年十月癸卯), 공하남곽융조(工河南郭戎造)"라는 명문이 전서로 새겨져 있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원래 그 안에 "부명사십이편(符命四十二篇)"이 들어 있었다. 이는 왕망이 천명을 빌어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산물이었고, 이렇게 큰 석각은 적어도 무게가 몇 톤이나 나갔다. 왕망시기 부궤상서(符匱祥瑞)의 분위기하에서의 물건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신망(新莽) 대천오십도범(大泉五十陶范)

호부석궤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고대유물을 연구하려면 반드시 지역의 역사풍모, 역사배경, 세월이 축적된 '역사의 기리(肌理)"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천천히 살펴보고, 이성적으로 분석해야한다. 그래야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역사의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려면 허구의 노를 저어 상상의 배를 몰아서 근본적으로 존재가 불가능한 역사장면을 환원시키거나, 혹은 현대의 개체생명체험을 고대인의 신상에 억지로 붙이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곤륜석각"의 30여자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먼저 진한의 역사배경을 고려하면, 진나라때 문헌은 청해에서의 관방활동에 관한 기록이 없다. 한나라때 역사문헌에서 비로소 서융(西戎)이 나타난다. 한나라 원시4년(기원4년), 왕망은 중랑장(中郞將) 평헌(平憲)을 보내, 재물과 이익으로 강인의 수령 양원(良願)을 회유하여, 그로 하여금 부족을 이끌고 청해호(靑海湖, 鮮水海), 윤곡(允谷, 지금의 共和縣), 염지(鹽池, 지금의 茶卡鹽湖)등 물과 풀이 무성한 땅을 한나라에 바치게 된다. 서한말기 왕망이 신왕조의 황제가 된 후, "사해귀일"의 정치상징을 만들기 위해 청해의 강인들에 대해 귀순활동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청해로 사람을 보내 대거 선전하고, 원시4년 서해군을 건립한다. 이는 중원의 신왕조중앙정권이 처음으로 청해를 통치관리한 것이다. 사서에 따르면 왕망은 "동해, 남해, 서해, 북해"의 4군체계를 갖추어 "사해귀일(四海歸一)"을 표방했다. 이때 환호지구에 서해군을 설치하고, 군의 치소는 용이성(龍夷城, 지금의 청해 해안형 삼각성 유적지)에 두었다. 청해 해안현에서 신망시기의 "서해안정"와당과 "사해안정원흥원년작당"의 와당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서한 왕망시기부터 동한초기까지의 증거체인이라고 할 수 있다.

2. 석각상의 이 "황제"는 아마도 진시황이 아니라, 서한말기에 건립된 신왕조의 왕망일 것이다. 왕망은 원시4년(기원4년)에 "재형(宰衡)"의 관직을 추가한 후, 다음 해에 섭황제(攝皇帝)를 칭한다. 거섭(居攝) 3년 신왕조의 건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신(新)"으로 하며, 시건국원년에 정식으로 황제의 보좌에 앉아, "진짜황제"가 된다. 왕망은 조정요원을 정국각지로 보내어, 신왕조 '황제'의 위엄을 선전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사자를 각지 및 흉노, 서역으로 보내어 한(漢)의 인수(印綬)를 거두고, 신(新)의 인수를 새로 하사했다." 신왕조가 건립된 후, 왕망을 칭송하는 풍조는 각지를 석권했다. 유생중 추종자가 있을 뿐아니라, 관리중 앞장서는 자가 있었다. 마치 서한말기에 나타난 특수정치의 새로운 면모이고, 왕망은 신기원을 열었다는 것을 표방했다.

3. 왕망은 진,한의 제도를 계승하여 "오대부(五大夫)"라는 관직을 설립했다. 진나라때에도 오대부는 있었다. 그리고 왕망은 또한 <주례.왕제>에 근거하여 거섭3년과 시건국4년에 두 차례에 걸쳐 오등작봉제(五等爵封制)를 건립한다. 다만, 왕망의 신왕조시기 "오대부"는 5개의 특정한 감찰관직이었다. 이 "오대부"는 5명의 관리의 성씨 혹은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주례>에 근거하여 "오사(五事)"(貌, 言, 視, 聽, 思)에 오대부를 설립한다. 각각의 명칭은 사공(司恭), 사종(司從), 사명(司明), 사총(司聰), 사예(司睿)로 전문적인 감찰계통을 형성하여, 군주덕행, 군신규범, 정책투명, 여론감독, 결책분석등의 직능을 수행한다. 석각의 '오대부'는아마도 왕망이 순수활동으로 파견한 "신(臣)"아래의 "예(翳)"일 것이다. 마땅하 감찰직책이었을 것이고, 약을 채취하는 태의나 의관은 아니었던 것이다. 왕망시기의 관제는 <주례>에 따라 명칭을 고쳐서 매우 번잡하고, 세부사항은 혼란스럽다. 사서에 기록이 있으니 여기에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다.

4. 왕망이 황제에 오른 후, 유생의 아이디어에 따라 미신참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장생불로를 추구하여, 계속 사람을 보내 선약을 구한다. 왕망은 진시황, 한무제와 마찬가지로, 단약을 먹고, 신약도술에 심취했으며, 방사 소락(蘇樂)의 말을 듣기 좋아했다. 시건국2년(기원10년)부터 신선과 관련한 일들을 벌여서, 팔풍대(八風臺)를 만들고, 오량화(五梁禾)를 심었으며, 특히 양성연명(養性延命)에 대한 흥취는 커져갔고, 궁안의 사람을 각지로 보내 선약을 캐도록 한다. 기실, 한성제(漢成帝)시기 연제(燕齊)지역의 방사(方士)로 신선술을 가진 사람이 만명을 헤아렸다. 한성제는 아들이 없어서 거액의 돈을 들여 장생불로약을 구한다. 방사들은 "바다로 가서 신약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정직하고 직언하는 곡영(谷永)은 선약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무계한지를 얘기했다. 한나라때 황실에서 사람을 보내 장생불사약을 구한 경우는 여러번 있었다. 왕망의 조정에도 방사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사서에 기록된 탁군(涿郡)의 방사 소군(昭君)등이 그에게 도술에 대해 강의했다. 그러므로 방사를 데리고, 수레를 끌고 "서순"한 것은 당당하게 내세운 황명이고, 수레에서 내려 "채약"한 것은 숨은 실제 파견목적이었다. 청해의 고해발지구는 동충하초를 채취할 수 있는 곳으로, 옥수(玉樹), 과락(果洛)이 핵심지역이며, 삼강원 및 성내의 여러 주, 시의 고해발 초원에 퍼져 있고, 본토의 약물자원도 매우 풍부하다. "채약"의 마애석각이 이곳에서 나타난 것도 이해가 된다.

5. 석각의 모든 줄의 첫번째 글자는 거의 모두 석층이 파손되거나 필획이 결실되었다. "廿六年"을 자세히 판별해보면, 깨지고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어, 확실하게 진시황 이십육년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六"은 "元"으로 보인다. 왕망때는 천봉원년(天鳳元年), "시건국원년(始建國元年)"의 연호가 있다. 그러므로, "입(廿)"자는0 떨어져나간 부분이 있어 아마도 다른 글자일 수 있을 것이다. 천봉6년(기원19년)에는 왕망이 태사령으로 하여금 삼만육천년을 역기로 하여, 6년에 1번씩 연호를 바꾸고, 천하에 포고하면서, 스스로 "이미 황제와 같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여, 백성들을 속였다. 이 시기의 역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다만 현재 발견된 석각은 왕망시기의 선명한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일부 글자는 편평형(扁平形)을 나타내고, 어떤 것은 수조상(竪條狀)을 보여, "호부석궤"의 자체와 비교하면 매우 비슷하다. 왕망시기에는 이런 류의 자체(字體)를 사용하여 복고(復古)의 뜻을 나타냈고, 적지 않은 "신망"의 유물은 복고주례(復古周禮)의 흔적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이 석각의 자체가 전형적인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전서의 발전을 이해하지 못한 오인인 것으로 보인다.

6. 깨지고 남아 있는 "예(翳)"자는 아마도 "왕예(王翳)"일 것이다. <사기. 항우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초기의 공신중에 "왕예"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수백년이 지났으므로, 이 석각의 "예"는 분명 왕망이 파견한 왕씨성의 종실관리일 것이다. 한성제때 왕씨집안에서는 5명이 대사마에 오르고, 9명이 후(侯)의 작위를 받았다. 당시 왕망은 왕씨일족을 대거 관직에 봉했는데, 왕순(王舜), 왕심(王尋), 왕읍(王邑), 왕흥(王興), 왕성(王盛)등이 있다.그리고 오위장군(五威將軍) 왕기(王奇)등 12명을 천하각지로 보내어 각각 부명(符命)을 반포하게 했고, 각지에서 "왕의 위엄"을 선포했으며, 돌에 새겨서 그 표시로 삼았다. 신왕조가 한왕조를 대체한 것은 하늘의 뜻에 순응한 것이고, 인심을 안정시키고 세간을 태평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왕망의 신왕조에서 왕씨일족에게 관직을 부여한 것은 최소 수백명에 이른다. 사료의 제한으로 정확하게 모든 관직에 오른 사람을 통계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석각의 왕예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는 추가로 조사를 해봐야할 것이다.

7. 왕망이 파견한 12갈래의 선위(宣威)를 위한 팀은 동,서,남,북에 모두 "수레(車)"로 뇌려풍행(雷厲風行)함을 보였고, 어떤 때는 네마리의 말이 끄는 큰 수레 "건호기(建虎旗)"로 천하에 위세를 보였다. 어떤 때는 오위장이 천문도상을 그려넣은 수레에 앉아, "천명을 전했다." 원래 한무제로부터 왕망시기에 이르는 때에 각양각색의 "수레(車)"가 나타난다. 청해성박물관에는 고고학적 발굴로 출토된 한나라때 목초거마(木軺車馬)를 전시한 바 있다. 유물은 각양각색이어서 여기에서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기로 한다. 왕망시기의 오위사자는 수레를 타고 천명을 전했다.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이때의 정치적 임무였고, 왕망의 "변법개제"의 하나는 <주례>에 근거하여 순행하는 것이다. 천봉원년 이월, 건인지절(建寅之節)부터 동남서북의 4개방향으로 차례로 각지를 순행하며, 농민들을 감독하고, 식량을 거두어 보관했다. 석각의 "일백오십리"를 보면, 각공(刻工)이 규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연도의 암벽에 급박하게 문자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여기에서 간단하게 글자를 새겨서 기념했을 것이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여, 순행의 성과를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가서 보고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8. "곤륜(昆侖)" 두 글자에 관하여 사서에서는 "崑崙" 혹은 "昆侖"이라고 쓰며, 일치하지는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외국문자의 음역이거나 흉노 알타이어의 음역일 것으로 본다. 2000여년동안 중국인들은 곤륜을 명산 혹은 선산으로 인식해왔다. 그리하여, "신이 사는 곤륜"과 실제의 곤륜, 중국경내의 곤륜과 이역의 곤륜간의 구분이 있어, "곤륜"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이 색깔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종족의 족명인지. <죽서기년(竹書紀年)>, <상서.우공>, <일주서.왕회해>, <사기.하본기>, <목천자전>, <산해경>등에도 모두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일일이 논술하지는 않기로 하고, 다만 곤륜이라는 말은 서북민족, 지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의문이 없다. 왕망이 사람을 보내 선약을 구한 '곤륜'도 멀어서 찾아갈 수 없는 개략적인 지역의 대명사일 뿐이다. 진나라사람들이 선약을 찾을 때나, 한나라말기의 선약을 찾을 때나 모두 방위가 불명확한 "곤륜"이었고, 고대 '곤륜'의 위치를 실증했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청해 마다현 찰릉호 북안에서 발견된 석각은 아마도 진시황이 보낸 사신이 남긴 유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나중에 왕망시기에 사람을 파견하여 채약하고 순시했을 때의 석각일 것이다. 시대가 다르고 중간에 200년의 차이가 있다. 시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문자서법, 간지역법, 단어판별, 사암풍화, 모든 증거가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전대의 사라진 역사를 가지고 후대에 타나난 석각문물을 해석하려고 하니 의문점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출토문물은 반드시 역사문헌과 서로 대조하여 인증되어야 한다. '눈은 높게' 하여야 하지만, '세세한 점도 장악하여야' 한다. 그저 상상에 의존하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고, "이건 위조자가 만든 장난이다"와 같이 아무 말이나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더더구나 정상적인 학술적 반박을 벗어난다.

서북대학의 이미 고인이 된 진직(陳直) 교수는 일찌기 우리 학생들을 교육할 때 이런 말을 했다: 진한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한서.왕망전>을 이해해야 한다. 몇십년전에 필자는 <왕망신전>(서북대학출판사 1997년), <유생(儒生),유신(儒臣),유군(儒君)>(섬서인민교육출판사 1993년)을 출간하여, 신망시기에 출토된 전폐(錢幣), 도량형, 간독(簡牘), 금속실물등 문물에 대해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서 학계에 참고할 수 있도록 약간의 견해를 제출한 바 있다.

석각이 돌연 세상에 나타나서, 진한역사를 꿰뚫고 있다. 칠순노인이 하고 싶은대로 말하는 것이니, 그저 믿고 싶은대로 믿으면 된다. 역사는 서서히 해답을 내줄 것이고, 결국은 원래의 진면목이 나타날 것이다. 역사에서 많은 진실된 이야기는 연대가 오래되어 시간의 장랑(長廊) 속에서 마모되고, 파손되고, 소실되었다. 고고학적 문물은 동시대의 언어로 표현된 사회역사문헌을 빌어 살펴보아야 비로소 역사는 신뢰할 수 있도록 진정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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