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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장군은 진정 겁쟁이였나 400년 동안 쌓인 불명예 벗겨”

赤松子 - 내 블로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26.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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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장군은 진정 겁쟁이였나 400년 동안 쌓인 불명예 벗겨”

글: 박정호 월간중앙 기획위원
[문화전문기자 박정호가 만난 세상]
〈원균의 진실〉 발간한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
〈선조실록〉, 〈난중일기〉, 〈징비록〉 등 각종 사료 새롭게 훑어
“조작과 왜곡 심각한 역사 기록, 원균은 이순신 못지 않은 명장”

임진왜란 당시 원균 장군의 실체를 파고든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 지난 400여 년 동안 무능의 아이콘이었던 원균의 명예회복을 시도했다. 경기도 평택시 자택 연구실 모습이다. [사진 백승종]


소년의 생일은 4월 28일이었다. 충무공 이순신과 날짜가 같았다. 소년은 생일날만 되면 기분이 좋았다. 해마다 충무공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는데, 라디오에서 관련 뉴스를 들을 때마다 우쭐해지곤 했다. 마치 자기가 이순신 장군이 된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년은 커서 역사학자가 됐다. 언젠가 <이순신 백과사전> 같은 두툼한 책을 써 볼 생각도 했다. 한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또 다른 한 인물이 마음에 걸렸다. 원균이란 이름의 장수였다. 임진왜란 당시 패장의 대명사로 불린 그 장군이다. 원균에게는 간신, 악장(惡將), 겁쟁이 같은 비루한 단어가 늘 붙어 다녔다.
그게 과연 얼마나 사실에 부합할까? <조선왕조실록> 같은 사료를 들여다볼수록 우리의 상식과 통념을 무너뜨리는 증거와 상황이 속출했다. “우리 역사에 이처럼 남루한 이름이 또 있을까?” 의문에 의문이 일었다.   
400년 동안 손가락질 받은 원균
역사학자는 도전에 나섰다. 지난 400여 년 동안 온갖 손가락질을 받았던 원균의 실체를 탐구해 보자고 결심했다. 2021년부터 원균 공부에 본격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원균의 진실>을 최근 발간했다. 부제는 ‘역사적 기억의 조작’. 한번 대놓고 붙어보자는 뜻으로도 읽힌다.  

[사진 논형출판사]


여기서 역사학자는 백승종 전 서강대 및 독일 튀빙겐대 교수다. 일상의 작은 사건이나 사물을 현미경처럼 파고드는 미시사(微視史)를 한국사 연구에 선구적으로 접목한 학자로 꼽힌다. <원균의 진실>도 그 연장선에 있다. <선조실록> <난중일기> <징비록>부터 원균과 관련된 각종 전기 자료와 상소문, 장계(狀啓·보고서) 등을 꼼꼼히 검토하며 이른바 원균의 복권에 나섰다. 무려 1100여 쪽에 이르는, 시쳇말로 벽돌책을 내놓았다.
상식 뒤집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원균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기억은 심각하게 왜곡돼 있다. 17세기 이후 충무공이 성웅으로 추앙받은 반면에 원균은 정반대로 ‘절대악’ 비슷한 이미지로 굳어졌다. 주변에서도 이번 연구를 많이 말렸다. 그런데 여러 문헌에서 거듭 확인했지만 원균은 분명 이순신에 버금가는 명장이었다.”
전에도 비슷한 주장이 제기됐는데….
“역사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형태로 출간됐다. 실록연구가 이재범의 <원균정론>(1983)이 대표적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기 전인데도, 일일이 실록을 뒤지며 공부했다. 그런데 기존의 주장은 대부분 단편적이었다. 소구력이 약해 이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선조실록>에는 어떻게 기록됐나?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공신을 책봉하는 문제가 가장 복잡했다. 공신도감(功臣都監)이라는 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엄격한 심사를 진행했다. 이순신과 원균, 권율 셋이 함께 1등인 ‘선무공신’으로 뽑혔다. 이순신의 공이 크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선조를 포함한 다수 의견은 두 장수의 공이 엇비슷하다는 쪽이었다. 선조는 <선무공신교서>에서 원균과 이순신이 함께 이끄는 수군에 크게 의지했다고 털어놓았다.”
왜란 초기 원균의 활약상을 주목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16만 명에 이르는 군사와 2000척의 거대 함대를 이끌고 부산항으로 밀려들었다. 경상도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은 사력을 다해 맞섰다. 그에겐 고작 10여 척의 배밖에 없었다. ‘우리가 물러나면 이 바다는 누가 지키겠는가’라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진해 서쪽의 요충지인 진주를 보호하기 위해 배수진을 쳤다. 이곳이 뚫렸다면 호남의 곡창지대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순신과 합동작전을 벌인 것 아닌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신중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계속 손을 내밀었지만 연합함대가 구성되기까지 20일이 걸렸다. 전라좌수영을 보존해야 하고, 조정의 출전 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순신이 바로 합류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 그럼에도 원균은 20일간 밤낮없이 왜군과 싸웠다. 연합군이 가동될 무렵 원균이 가동할 수 있는 배는 단 4척이었다. 이를 보고도 그를 무능하다고 매도할 수 있는가.”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에 있는 원균 사당(왼쪽)과 묘소. [사진 논형출판사]


원균과 이순신의 합동작전 주효
이후 연합함대는 승리를 거듭했다. 한산대첩 대승도 있었다.
“1592년 7월 8일에 벌어진 한산대첩은 왜란에서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조선 해군은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하며 일본 수군을 한산도 바깥 바다로 끌어내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왜군은 방어 위주로 전략을 바꾸었다. 당시 원균의 경상우수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여럿 남아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선 수군이 거둔 거의 모든 승리를 이순신 한 사람의 공적으로 돌리는 데 너무 익숙해졌다.”
조선 수군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에 대한 기존 해석을 완전히 뒤집었는데….
“칠천량 해전은 원균의 무능이 빚은 참사로 이해된다. 1597년 7월 16일 새벽, 경상도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해협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괴멸당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칠천량의 비극은 원균 개인의 오판이라기보다 육전의 논리로 해전을 지배하려는 조정의 무지와 권율의 강압이 빚은 참극이었다. 실록을 검토하면 칠천량 사태는 예고된 재난이었다. 원균은 결국 이 해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적과 싸워 죽거나 다친 피해자가 별로 없었다. 후대의 기록들이 원균의 죄를 가중하기 위해 피해 규모를 의도적으로 부풀린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을 보면 선조 임금이 나중에 이를 반성하는 대목이 나온다.”
선조가 뭐라고 말했는가?
“<선조실록> 1601년 1월 17일자 기록이다. ‘한산 싸움(이른바 철천량 사태)에서 그(원균)가 패전한 것을 문제 삼아 그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그것이 어찌 그의 잘못이겠는가. 바로 말해 조정에서 그를 재촉해 하루빨리 (부산포로) 들어가라고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중략) 그는 반드시 패할 줄 알면서도 (부산포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과연 그가 스스로 패한 것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원균이라면 음험하고 지혜가 부족한 바보로 취급하지만 동시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역사적 왜곡이 깊어진 것인가? 그것도 400년 가까이 정설 비슷하게 내려왔다.
“다각면인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정치적 당쟁을 들 수 있다. 원균은 북인, 그중에서도 대북이 가장 열심히 밀었는데, 대북은 광해군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이순신은 유성룡을 비롯한 남인이 주로 밀었다. 서인은 이순신과 원균을 고루 지지했으나 북인이 없어지면서 원균을 비호할 세력이 실종됐다. 또 이순신은 원균보다 1년 더 살았다. 전쟁이 끝나고 신군부가 편성됐을 때 누가 유리했겠는가? 원균이 죽은 다음 원균의 중요한 부장들도 결국 이순신 휘하에서 일하게 됐다. 사회 문화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어떤 요인을 말하는가?
“조선은 이후에도 인조 때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 국가적 대위기를 겪었다. 영조 정조 대에 전국 각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국가를 지키는 충신의 개념을 강하게 부각할 필요가 있었다. 이순신은 나라를 구한 영웅, 백전불패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은 반면 원균은 간신, 비겁자로 폄하됐다. 그런 통념이 21세기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원균은 무능한 바보라는 생각이 사회 곳곳에 스며있다. 예컨대 지금도 선거철이 되면 자기편은 이순신이요, 상대편은 원균이라는 비방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원균 장군이 왜란 초기 집중적으로 방어한 경남 사천과 곤양 일대. 오른쪽은 선조 임금이 원균의 죽음을 애도하고, 공로를 기리며 내린 제문이다. [사진 논형출판사]
<난중일기> <징비록>의 일방적 주장
유성룡의 <징비록>이 남긴 부정적 영향을 언급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에 대한 반성이 담긴 대표적인 저작인데도 말이다.
“<징비록>은 국난 극복에 앞장선 영의정의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순신 편애, 원균 비방이라는 편향성이 심하다. 사실을 잘못 기록한 부분도 많다. 일례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처음 조선을 침략했을 당시 유성룡은 원균이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고, 그것도 전선 100척을 바닷속에 던졌고, 그 수하의 수군 1만여 명이 무너졌다고 썼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다. 당시 원균 담당 지역의 전함을 다 합쳐도 20척이 못 됐는데, 어떻게 100척에 1만 병사를 언급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유성룡은 원균 한 사람에게 전쟁의 모든 책임을 돌리려고 했다.”
<징비록>은 전후 일본에서 큰 자극을 주었는데….
“원균은 <징비록>에서 최악의 인물로 묘사됐다. <징비록>은 17세기 이후 일본인 학자는 물론 일본 상업소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원균은 일본에서도 아주 볼품없는 졸장(拙將)이 되고 말았다. 반면 이순신은 일본 사무라이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징비록>이 한일 양국의 문화 교류 측면에선 분명 고무적이지만 서술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해선 깊이 있는 성찰이 동반돼야 하다. ”
이순신의 <난중일기>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의 극단적인 대립은 동서고금에도 드물다고까지 기술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원균을 120회가량 언급했다. 상대에 대한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 둘의 갈등은 부하들 사이의 대립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조선 수군의 운영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다. 전쟁 초기 원균은 이순신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이순신은 그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상태에게 원균의 관내인 남해현의 군사시설을 불태우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난중일기>는 분명 뛰어난 전쟁기록물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면 조선 수군의 전반적인 흐름을 놓칠 수 있다. ”
이순신은 한국사 최고의 장수 아닌가?
“물론이다.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는 나라를 구한 명장이요, 엄격하고도 다정한 선비였다. 이번 책도 이순신 비판이 아니다. 다만 왜란 당시 이순신과 쌍벽을 이루었던 원균의 유산이 철저히 사장된 연유를 밝히려고 했다. 이순신이 혐오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균이 지금껏 만인의 적처럼 남아서야 되겠는가. 17세기 이후 이순신은 정치적인 상품이 됐다. 정조가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며 이순신 영웅화를 완결했다. 정조는 친히 어필로 이순신 비문을 짓기도 했다. 이순신은 19세기 후반 일제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호국신’으로 자리 잡았고,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 구국의 위인으로 추앙받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순신 장군의 위업은 대단하다. 하지만 이순신의 이미지를 등에 업고 반대파를 공격하는 행태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이순신의 정치적 상품화는 여전하다. 좌든 우든 애국자, 혹은 민족주의자로서의 위상을 높이려는 수단으로 이순신 이미지를 이용한다. 반면 원균의 추락한 위상은 더더욱 회복하기 어렵게 됐다.”
백승종 교수는 왕성한 저술가다. <상속의 역사> <신사와 선비> <세종의 선택> <해월 최시형>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유학과 산업사회> 등 30여 권의 역사서를 냈다. 범죄수사관이 사건 현장의 흔적을 하나하나 찾아가듯 역사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연구를 주로 해왔다. 조선 500년을 떠받친 유학의 근본 정신이 지금 이 시대 현안을 풀어가는 실마리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신성리학자’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에 관한 주요 기록물.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선조실록' , '난중일기',  '징비록'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을 돌아보는 특별전(3월 3일까지)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연합뉴스, 뉴시스]


21세기 ‘가짜 뉴스’의 위험성
역사의 통념을 전복한다는 점에서 논쟁적이다. 기존 역사학계나 일반인의 비판과 반격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오늘날 이순신 신화에 도전하는 것은 정치적, 혹은 학문적 자살행위가 될 수 있다. 이번 나의 주장을 누구나 부정하거나 반박할 자유가 있다. 이번 책에서 제시한 사료 비판에 어떠한 오류나 잘못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언제든지 환영한다. 어떤 반론도 두렵지 않다. 한국사회 최고의 정치적 상품인 이순신과 원균의 대립적 이미지를 폐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역사 인식은 공정성을 상실한 채 표류할 것이다.”
디지털 사회의 ‘가짜 뉴스’도 경계했는데….
“우리는 정치적 이해 관계가 엇갈릴 때,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른 기억과 평가에 도달할 수 있다. 모든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사회에서도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원균에 대한 가짜 뉴스 또한 온라인 공간에서 사실처럼 굳어지고 있다. 역사와 사회를 보는 균형적 시각은 언제나 중요하다. 진실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요즘처럼 무엇이든 쉽게 왜곡할 수 있는 디지털 만능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사료 분석이 방대하고, 등장인물도 복잡하게 얽혀있어 이 책을 일반 독자가 따라가기에는 벅찬 구석이 있다.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 속에 파묻힌 원균이라는 패자의 서글픈 연대기를 일일이 따라가다 보니 분량이 방대해졌다. 이번 성과물을 일반 대중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교양서를 준비하고 있다. 원균의 본모습을 널리 알리려는 차원에서 지난해 원균연구회를 조직했다. 현재 200여 명의 회원이 있다. 앞으로 원균에 대한 각계의 연구 성과를 1년에 두 차례 정도 발표할 예정이다.”
역사학자를 선택한 계기가 각별하다.
“부친이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따른 보안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르셨다. 어려서부터 좌절한 부친을 보며 자랐다. 나 또한 연좌제에 걸려 공무원이 되거나 일반 회사에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다.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역사에서 찾은 것 같다. 1985년 전두환 정권이 연좌제를 풀면서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독일에 유학 가서 미시사 방법론을 심화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나쁜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웃음) 
원균의 글씨는 왜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까

2025년 처음 공개된 원균의 서한. 현재 남은 원균의 유일한 글씨다. [사진 논형출판사]

 

지난해 여름 원균이 쓴 편지 한 편이 공개됐다. 한자 초서체로 힘차게 써 내려간 이 편지는 ‘고양동 회납(高陽洞 回納)’, 즉 ‘고양동에 답장 올립니다’로 시작한다. 편지 끝에는 ‘원균 돈(元均  頓)’, 즉 ‘원균 올림’이라고 적혀 있다.  
여기어 ‘고양동’은 수원 고양동(현재 고등동)을 가리킨다. 선조 24년(1591) 6월께 원균이 고양동에 살던 친구에게 띄운 편지다. 당시 실직 상태였던 원균은 그해 흉년이 심해 가족이 끼니를 잇기 어려운 형편이라며, 친구가 아들 원사웅을 만나거든 그런 상황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백승종 교수는 “글씨를 보면 원균의 활달하고 거칠 것 없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가족에 대한 따듯한 마음도 담겨 있다”며 “유교적 교양이 높은 명가 출신인 원균은 한문에도 능통한 선비이자 무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평했다.
이 편지는 현재 남아있는 원균의 유일한 글씨다. 434년 만의 ‘발견’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선조실록>에 실린 여러 편의 보고서 등 적잖은 문서를 썼던 원균의 글씨는 왜 이 편지 한 편밖에 전하지 않을까. 백 교수는 해당 편지의 중요성을 고려해 이번 책 하드 커버 바로 뒤쪽에 소개했다.
백 교수는 원균의 글씨가 유실된 주요 원인으로 원균 직계 가족의 단절을 꼽았다. “영조 4년(1728)에 무신난이라는 반란이 일어났는데, 원균의 직계 후손들이 간접적으로 연관이 된 것 같다. 원씨 일가가 항아리에 주요 문서를 숨겨 놓고 집을 떠났는데, 이후 돌아오지 않고 소식이 영영 끊겼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문서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언제 어디선가 원균의 다른 작품이 나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ㅣ 박정호 월간중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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