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제물 의식 현장에서 본 세계 종교의 출발점
소 제물 의식 현장에서 본 세계 종교의 출발점
글: 유민호 자유기고가
문명의 원점, 문화의 접점, 인류의 초점│특별판
인류의 요람, 역사의 어머니 인도①
죽음으로서의 피가 아닌 재생·부활·탄생으로서의 혈
거짓·증오·분노·질시 대신 신령한 피로 채워진 나라
인류의 요람, 인간 언어 발상지, 역사의 어머니, 전설의 할머니, 전통의 증조할머니. 인간 역사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익한 자료들이 보존된 곳. 바로 인도다.” 미국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크 트웨인이 평한 인도관(観)이다. 한국인에게 인도는 카레, 요가, 나아가 불교 성지 순례지 정도가 대세일 듯하다. 인도 경제 급등이라고 하지만, 아직 피부로 와 닿을 만한 기세는 아니다.
인도는 한국만이 아닌,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신비의 나라다. 왜일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인도 스스로가 자기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란 것이 가장 큰 배경 중 하나다. 더불어 인도를 하나로 압축해 설명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1만 명 이상이 쓰는 언어 120개, 2000개 이상 민족으로 구성된 14억7000만 인구의 나라가 인도다. 태양계 밖 미지의 혹성 탐험이랄까? 이번 호부터 ‘문명의 원점, 문화의 접점, 인류의 초점’ 특별판으로 인도 연재를 시작한다. 코끼리의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왜 인도가 인류의 요람, 역사의 어머니인지 관찰하고 분석해본다. [편집자 주]

아샘 구와하티 카마캬 사원은 동물 제사를 지금도 시행하는 곳이다. 모신에게 바치는 최대의 선물은 살아있는 피다.
글을 쓰는 지금은 신년 1월이다. 그러나 인도는 아직 아니다. 인도는 종교 종파마다 신년이 전부 다르다. 1년 내내 신년 달력을 파는 나라로, 각자의 신년 행사나 의식에 관련된 날이 1년 내내 펼쳐진다. 힌두교는 1년 365일이 아닌, 354일 또는 355일이다. 태양과 달의 주기를 섞어 쓰는 달력이기 때문이다.
하루도 24시간이 아닌 23시간과 25시간 중간 어디쯤이다. 인도와 한국은 3시간30분의 시차를 갖고 있다. 1시간 단위가 아닌, 30분 단위 시차를 채택하는 희귀한 나라가 인도다.인도는 시간, 시차, 계절, 연도를 규정하는 출발점이 서방과 젼혀 다르다. 정부의 공식 힌두 신년은 3월 19일로 규정돼 있다. 그러나 수많은 힌두 종파, 나아가 이슬람을 비롯한 다른 종교와 종파는 나름의 신년을 고집한다. 결국 1년 내내 어디에 가든 신년 행사를 볼 수 있고, 거기에 맞춘 풍습과 의식이 연출된다.
연 날리기는 1월 인도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1월 14일 전역에서 열리는 ‘마카르 산크란티(Makar Sankranti)’라는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연날리기다. 마카르 산크란티는 밤보다 낮이 길어지는 첫날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는 의미에서 새 출발의 상징으로 연을 날린다.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과 옷도 나눠주는 성스러운 날이다. 필자가 신비하게 생각한 것은 연날리기다. 아이들이 몰려다니면서 곳곳에 연을 띄운다. 기묘한 것은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연을 날린다는 점이다. 한국인이라면 연날리기에 빠진 적이 있을 것이다. 춥기는 하지만, 겨울 강풍과 함께 연이 하늘 높이 올라간다. 인도는 겨울에도 바람이 거의 없다. 한국식 강풍, 영하의 날씨가 아닌, 바람 한 점 없는 대략 섭씨 10도 정도가 인도의 겨울이다.
시간 개념부터 특별한 국가
처음 연을 봤을 때 기억이지만, 하늘에서 호외나 삐라가 내려오는 줄 알았다. 연이라지만, 중심을 잡으면서 하늘로 치고 올라가는 꼬리 달린 모습이 아니다. 장식물 하나 없이 밋밋하게 사각형 방패 하나로 움직인다. 바람도 없는데 어떻게 날릴까? 건물 2층에 올라가 방패연을 툭 던진 뒤 여기저기 달리면서 연을 살살 위로 올린다. 이동하면서 연에 바람을 조금씩 불어넣는 식이라고나 할까? 공기의 이동이 조금만 있어도 연이 하늘에 떠 있게 된다. 연 자체가 엄청 가볍다. 연줄을 툭툭 치면 연이 살랑살랑 움직이며 하늘을 지킨다. 연이 아래로 떨어지면 다시 줄을 조금씩 당기거나 밀면서 하늘로 올린다. 바람을 가르는 부드러운 연이 아닌, 뒤뚱뒤뚱 자리를 지키면서 똑바로 서려는 오뚝이 연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높이 올라도 10m 정도가 한계인 이유다. 어린이들은 그런 오뚝이 연을 이용해 줄 끊기, 높이 날리기 같은 경쟁을 한다.
오뚝이 연을 처음 봤을 때 생각난 것은 제로라는 수치다. 인도인이 발명, 아니 발견한 개념이자 수치다. 제로는 문자 그대로 ‘무(無)’에 해당한다. 인도인은 그러한 무를 ‘유(有)’로 형상화한 나라다. 한국, 일본, 중국은 1에서 2, 2에서 3으로 나아가는 나라다. 기본·기반이 없으면 앞뒤 구별도 못 한다. 조선 500년 쇄국관에 따르면 섣불리 없는 것을 만들 경우 3대 멸족으로 갈 수도 있다. 제로는 창조만이 아닌, 터부의 대상이기도 하다. 제로의 나라 인도는 창조와 터부 타파를 동시에 이룩한 땅이다. IT, 나아가 최근 인공지능(AI) 분야 최대 두뇌가 인도인이다. 인도 상황을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숫자를 대하는 감각만이 아닌, 세계를 대하는 눈과 속도가 다른 나라와 전혀 다르다. 능률적이고 효과적이란 의미만이 아닌, 아예 생각지도 못한 것을 창조해내는 ‘제로에서 1’로의 나라가 인도다.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연을 날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인도다.
2026년 서방 달력에 맞춰 신년맞이 장소로 잡은 곳은 아샘(Assam) 구와하티(Guwahati)란 곳이다. 아샘이라고 하면 몬순 기후로, 여름철 폭탄 강우로 유명하다. 6월부터 10월 우기에 평균 3000㎜ 정도의 비가 내린다. 숲으로 이어진 아열대성 기후이기 때문에 비가 내릴 경우 대홍수로 이어진다. 아샘은 인도 동북쪽 끝에 위치한 곳으로 방글라데시, 부탄, 미얀마와 인접한 지구 오지 중 하나다. 필자에게 아샘 지방은 낭만과 환상의 땅이다. 30여 년 전 미얀마에 처음 들어갔을 때 육로로 아샘 지방에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얀마 소수 부족 간 국경 주변 전쟁으로 통과하지 못했다.
필자 지론이지만, 직접 걸어서 국경을 넘는 것이 좋다. 거창하게 말해 땅의 기운, 인간의 영혼이 국경선 하나로 나뉘고 달라질 수 있다. 유럽처럼 문명화한 곳에서는 별 차이를 못 느끼지만, 원시가 숨 쉬는 땅일수록 국경선 특유의 아날로그 파워가 녹아있다. 요즘은 인터넷 심카드 판매 장소로 변했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을 불온하고도 위험한 공기와 냄새가 저개발국 국경선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번에도 인도행 국경 이동은 미얀마 내전으로 불가능했다. 뉴델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만에 구와하티에 도착했다.
오리지널 힌두 도시와의 만남은 구와하티를 신년맞이 공간으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다. ‘힌두 에센스’라고 할까? 이슬람과 무관한 100% 힌두 전통과 문명·문화의 현장을 보고 싶었다. 힌두교는 다양한 인도의 얼굴을 종교로 연결한 결과물이다. 특별한 율법에 기초한 신, 사제, 신자들과의 관계가 아닌, 동일한 의식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신을 모시는 공동체로서의 힌두교다. 가톨릭이나 이슬람처럼 뭔가 일직선으로 표현할 만한 체계화한 종교가 아니다. 지역, 언어, 인종, 민족, 종파에 따라 힌두를 대하는 자세와 방법이 전부 다르다.

무소유와 무집착은 해탈로 가는 최선의 길이다. 인도인은 40세가 넘으면 해탈을 위한 평생 순례에 나선다.
오리지널 힌두 도시 구와하티
힌두 3대 신, 즉 브라흐마(Brahma: 창조의 신) 비슈누(Vishnu: 유지의 신), 시바(Shiva: 파괴의 신)에 대한 존경과 믿음은 똑같다. 다만, 신을 모시는 의식이나 찬미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민족, 언어,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신을 대하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아샘 구와하티는 그 같은 백인백색 힌두교의 다양성을 극명히 느낄 수 있는 인류 종교사의 천연기념물에 해당할 곳이다. 전 세계 문화인류학자라면 한 번씩 들러 관찰해야 할 ‘모신(母神) 숭배’의 원형이 살아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모신은 인류 최초의 신이다.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모신은 율법과 의식이 구체화하기 전부터 등장한 인류 종교의 원형(아키타이프)이다. 출산을 통해 노동력을 보장하고, 자식에게 무한한 애정을 퍼붓는 어머니야 말로 인간이 처음으로 맞은 ‘신의 얼굴과 마음’ 그 자체였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엄청난 몸매와 가슴을 가진 여성이야말로 원시 공동체 인류를 하나로 묶고 보호한 수호신이다. 고대 신의 첫째 조건은 육체적·심리적 ‘보호 역할’에 있다. 모신은 자식은 물론 공동체를 보호하는 칼이자 창이다. 아샘 구와하티는 그 같은 원시 모신 사상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
필자의 구와하티 목적은 시 외곽 산중에 들어선 카마캬 사원(Kamakhya Temple) 방문에 있다. 힌두에서 모신 사상은 ‘샥티(Shakti)’ 신앙으로 연결된다. 샥티는 산스크리트어로 ‘힘 에너지 능력’을 의미한다. 힌두 사상에 따르면 우주의 근원적 파워는 ‘여성적 에너지’에서 나온다고 한다. 샥티 신앙에서 여신은 남신을 돕는 보조 수준이 아니다. 남신을 뛰어넘은 우주의 절대적 주권자이자 근원으로 추앙받는다.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는 신과 예수를 잇는 삼위일체 성체(聖体)로 풀이된다. 개신교는 예수와 신에 집중할 뿐 성모 마리아를 논외로 한다. 힌두교는 여신을 남신 위에 선 우주 창조의 근본으로 해석한다. 힌두교 최대 신인 시바도 샥티 없이는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샥티, 즉 모신의 원형은 크게 세 명의 여성에서부터 시작된다. 사티(Sati,) 카마캬(Kamakhya), 드루가(Druga)가 힌두 모신의 원형이다. 이들은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의 부인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힌두의 상징은 남성 성기를 형상화한 링가(Linga)로 압축된다. 힌두 사원에 들어가는 즉시 링가를 보듬고 물을 뿌리는 의식을 행한다. 남성 성기와 여성의 사랑이 결합된 ‘재생과 탄생’으로서의 링가 의식이다. 일단 남신 시바가 주인공이고, 물로 표현된 사랑으로서의 여성은 조연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구와하티 카마캬 사원에서 경험한 모신 숭배 의식은 기존 링가 찬미와 다르다. 시바는 아예 논외로 하고 모신, 즉 사티, 카마캬, 드루가와 같은 여성신에만 집중하는 의식이다.

바람이 없는 하늘에서의 연날리기. 제로를 만든 인도인의 발상을 이해할 최적의 본보기가 오뚝이 연이다.
‘샥티’ 신앙으로 연결된 모신 사상
구와하티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카마캬 사원으로 향했다. 경주 불국사처럼 산을 돌고 돌아 도착했다. 산 아래에 길이 3000㎞에 이르는 아샘 최대의 강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가 보인다. 여름철 대홍수로 전 세계 뉴스에 오르내리는 진흙탕 강이다.
아침 9시인데도 의식 참가 행렬이 엄청나다. 신년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을 제외할 경우 지금까지 필자가 접했던 그 어떤 사원이나 교회보다도 긴 대행렬이다. 사원까지 1㎞ 밖인 데도 사람들로 뒤엉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다. 의식 참가자와 순례객 모두 꽃과 초로 이뤄진 공물을 들고 신전으로 향한다. 상상컨대 2500여 년 전 그리스 아폴로 신전을 찾아가던 순례객 행렬의 재판이란 생각이 든다. 신의 모습을 한 갖가지 아이돌·아이콘이 1달러 정도 가격에 팔리고 있다. 신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무병을 염원한다. 힌두교 원리지만, 장수는 없다. 오래 사는 장수는 중국 세계관의 일부일 뿐 윤회를 믿는 힌두나 불교와 무관하다. 지상에서의 장수가 아닌, 영적 세계에서의 해탈이 힌두, 불교의 이상향이다. 무병과 소원을 함축한 조형물이 지금도 고대 그리스 신전 주변에서 발굴된다. 카마캬 사원 주변 힌두 아이돌·아이콘과 똑같은 성격의 조형물이다. 신전 공물들이 그리스 고고학 유물 유산으로 대우받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언젠가 카마캬 사원 주변 조형물도 박물관 전용 전시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 여행의 기본으로 신발 주걱을 빼놓을 수 없다. 어디를 가든 주머니에 항상 들고 다니는 것이 좋다. 힌두, 불교, 이슬람 그 어떤 신전이라도 신발을 벗는 것이 기본 예의다. 주걱이 있으면 여러모로 편하다. 그러나 인도 어디에서도 주걱을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맨발로 카마캬 신전으로 들어가자 소, 코끼리, 모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모두 행복하고 기쁜 모습이다. 현대 종교 관점에서 보면 미신의 극치라고 볼 장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수많은 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힌두 신자들의 자세와 모습이 너무도 진지하고 활기차다. 서방처럼 격식화하거나 사제들의 규율에 맞춰진 ‘엄숙한 신’이 아니다. 사제가 있기는 하지만, 신자와 신이 수직으로 연결된 구도다. 문명화한 사회일수록 신과 인간 사이의 사다리가 많아진다. 신자도 수평이 아닌 수직적·계급적 구도로 바뀌면서 신을 접할 기회도 순위에 따라 달라진다. 힌두교는 그 같은 사제나 신자 사이 상하개념이나 순위와 무관하다. 신자와 신의 관계가 일직선 최단거리로 이뤄져 있다. 사실, 유일신 사상으로 보면 다신교 힌두교만큼 무지몽매한 종교도 없다. 그러나 삼라만상 신을 믿는 힌두 신앙으로 보면 기독교나 이슬람 같은 유일신만큼 이기적이고 편파적인 종교도 없다.
모신 숭배 의식의 중심 카마캬 사원
모신 숭배 의식이 이뤄지는 카마캬 사원 중앙 제단으로 향했다. 결론이지만, 근처도 못 가고 포기했다. 새벽 2시부터 대행렬이 한 줄로 길게 기다리기 때문이다. 모신을 모신 중앙 제단은 30명 정도 들어갈 협소한 공간이다. 기도와 함께 대략 1분 정도 의식에 참여한다고 한다. 본당 참관은 어렵지만, 카마캬 사원 ‘동물 제사’ 의식은 결코 빠질 수 없었다. 영화 속에서나 보는 소와 양을 처형해 신에게 바치는 피의 의식이다. 카마캬 사원만의 대대손손 전통 의식이다. 필자가 들른 날은 오전 11시, 오후 2시에 두 번 치러졌다. 동물 제사는 신에게 감사하고 뭔가 기원하려는 신자들의 요청으로 이뤄진다. 어떤 동물을 제물로 바칠지 신전지기와 상의한 뒤 헌금과 비용을 치른 뒤 제사에 직접 참여한다. 요청자는 가족 전원 참석 하에 사제들이 행하는 동물 제사 장면을 직접 목격한다. 여신 카마캬에 바치는 공물로서의 동물 제사이기 때문에 부정시해서는 안된다. 동물 제사에 임하는 사제는 대대손손 같은 일만 해온 신전 내 특별 신분에 한정된다. 한국식 개념으로 ‘동물처형=백정’이 아닌, 신을 즐겁게 만드는 신의 종으로서의 동물 제사 도우미다.
동물 제사는 오전 11시 정각 시작됐다. 제물은 몸집 300㎏에 육박한 거대한 숫소다.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 듯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힌두교는 생명을 중히 여긴다. 동물만이 아닌 곤충이나 식물이라도 중하다. 동물 제사는 힌두교 교리에 정면으로 반한다. 그러나 모신 사상에 기초한 동물 제사는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모신은 피를 필요로 한다. 죽음으로서의 피가 아닌, 재생·부활·탄생으로서의 피다. 제사용 소는 반드시 성체, 숫소, 숫양, 숫염소에 한정된다. 동물 처형은 끝없는 윤회를 끊고, 모신이 머무는 세계로의 해탈을 의미한다. 힌두교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은 성스러운 죽음이자 해탈의 출발점으로서의 동물 제사다. 필자가 보면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한 키빌레(Cybele) 신앙과 거의 비슷다. 사자 위에 올라탄 여신 키빌레의 모습은 코끼리나 호랑이를 탄 인도 모신 사티, 카마캬, 드루가의 아바타로 느껴진다.
붉은 옷을 입은 사제 10여 명이 동시에 나타났다. 소는 줄에 묶인 채 꼼짝도 못 한다. 사제들이 긴 바나나 잎 위에 꽃과 음식을 장식한다. 가끔 소에 성수를 뿌리면서 기도하기도 한다. 힌두 특유의 붉은색·노란색·오렌지색 분말을 소 몸 전체에 뿌린다. 대략 30분 정도의 준비가 끝나자 숫소를 처형장으로 끌어들였다. 높이 3m 정도 두 개의 수직 나무 사이에 소 머리를 고정시킨다. 나무 사이에 목과 뿔을 걸친 뒤 나무를 다시 조여 목과 몸을 바짝 죈다. 소의 네 다리도 굵은 밧줄로 고정된다. 소의 몸은 큰 대나무로 치켜 올라간 채 붕 뜬 상태가 된다. 대략 20명 정도가 달라붙어 소를 완전 고정시킨다.

동물 제사는 주로 수컷 소와 양을 공물로 사용한다. 단칼에 죽인 뒤 피와 고기를 모두 나눈다.
‘혼돈 속 질서’ 묘한 매력의 정점
사람들이 소와 씨름을 하던 중 갑자기 길이 1m 정도의 긴 칼을 든 사제가 나타났다. 반달형 칼로 일명 ‘카트가(Kharga)’라 불리는 처형 전용 도구다. 사제가 단칼에 소의 목을 잘랐다. 비명은커녕 소리 하나 없는 무성영화처럼 간단히 끝났다. 칼로 자르기 직전 소를 위한 특별한 의식이나 기도도 없었다. 그냥 소에게 다가와 한순간 칼을 휘둘렀다. 잘려진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절단된 소의 목은 곧바로 흰색 무명에 감싸진 채 사원 본당으로 옮겨졌다. 여신 카마캬에게 바치는 공물이다. 동물 제사를 주관한 가족 모두 소의 피를 이마에 적신다. 모신의 축복과 사랑을 이마 한가운데 피로 표현한다. 목이 잘린 상태인 소의 몸은 식용 고기로 나뉘어 가족과 주변 모두에게 분배된다. 신의 축복이 깃든 공물이란 점에서 모두들 필사적으로 원한다. 몸의 병이 낫는다고 하는데, 출산을 앞둔 여성이나 자식을 원하는 가족은 특히 제사용 고기를 원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인도의 맛은 깊어져 간다. 들를 때마다 항상 새로운 만남이 있고 신선한 자극과 충격도 이어진다. 유럽 여행은 평화로서, 인도 여행은 긴장으로서의 시간이라고나 할까? 코스모스(Cosmos: 질서)에 새겨진 평화를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카오스(Chaos: 혼돈) 속 거친 숨소리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코스모스의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고 수동적으로 대응하기 쉽다. 카오스는 시간 하나하나가 땀과 기억으로 새겨질 수 있다. 위선이나 핑계가 안 통한다. 집 문을 나서는 순간 적나라한 현장과 생존이 기다리는 나라가 바로 카오스 인도다. 한눈팔다간 한 방에 날아간다. 몸과 마음의 안테나를 수직으로 세워 사방팔방 자신의 오감을 확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피곤하다거나 정신이 없다고 말할 듯하다. 거짓·증오·분노·질시로 채워진 짝퉁 코스모스 세상보다는 100%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카오스 인도에는 거짓·증오·분노·질시가 거의 없다. 그 같은 감정을 표현하고 확대할 만한 환경·여유·공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가뭄과 기아가 만연하는 땅에서 리조트 개발을 부르짖는 격이라고나 할까? 화장실 5개 달린 수백 평 한강 뷰 아파트보다는 지금 당장의 끼니와 공간이 필요하다. 인도 풍경이지만, 남을 누르고 이기면서까지 끼니와 자기 공간을 확보하려는 사람이 아예 없다. 끼니와 공간 확보에 목을 맬 경우 경쟁보다는 거리의 걸인을 선택한다. 인도 거리의 수많은 걸인은 한국 사회 곳곳에 새겨진 거짓·증오·분노·질시의 반사경에 해당한다. 한국인 대부분이 거짓·증오·분노·질시로 향하는 동안 인도인은 거리의 걸인으로 구걸에 나선다. 경쟁적·상대적 관점에서의 삶이 아닌, 신을 염두에 둔 절대적 가치관 속에서의 카오스 인생이다.
끼니와 공간이 없다는 것은 신이 나에게 내려준 운명일 뿐이다. 옆집 한강 뷰 아파트는 부러워하거나 질투를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거짓·증오·분노·질시와 무관한, 오뚝이 연과 어머니에게 바치는 피로 채워진 땅이 바로 인도다.
유민호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ㅣ 유민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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